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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Nov 25. 2021

제 속도가 있겠지요

 현 직장에서 벌써 네 번째, 그리고 마지막 가을이다. 회사 주차장에는  건물 2층 높이 정도 되는 꽤 큰 은행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잘 보이는 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매 년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사무실에서 정문 방향을 방향으로 중앙 통로가 있고, 통로 양쪽으로 은행나무가 다섯 그루씩 심어져 있다. 가장 왼쪽에 있는 은행나무 세 그루는 2021년 11월 11일 현재 노랗게 물든 잎이 반 이상 떨어져 있다. 중앙 통로 오른쪽 은행나무 다섯 그루 중 가장 왼편에 있는 나무는 샛노란색 은행잎이 가득이고, 그 옆 나무는 반은 노란색, 반은 초록색이다. 그리고 그 옆 나무는 아직 푸르다. 지난 몇 년을 돌이켜보면 시간이 지나 옆 나무들이 다 색을 바꾸고, 잎을 떨구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을 때 이 나무 혼자만 풍성한 잎을 자랑하며 위엄 있게 서 있었다. 같은 장소에 있는데도, 바로 옆에 있는 나무인데도 이렇게 다르다. 그렇다고,


- , 주변 나무들은  단풍이 들고 떨어지는데, 11 11일에는 노랗게 물들어야지.  이렇게 느려? 멍청한 나무구나, 능력이 없구나


 하지 않는다. 적은 차이라도 햇빛의 양을 달리 받았거나, 심은 시기가 다르거나 품종이 다르다거나 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냥 제 속도대로 물들고 제 속도에 맞춰지는구나 할 뿐이다. 오히려 늦게 물든 나무 덕에 오래오래 노란 은행잎을 볼 수 있어 좋다.


 이런 자연의 이치를 잘 알고 있지만 사람에게 적용이 쉽지 않은 것 같다. 취업 시기, 결혼시기, 자녀를 낳을 시기 등을 정해두고 그 시기에서 조금 벗어나면 불안해하고, 가족의 걱정거리 취급을 받기도 한다.


 얼마 전 연예인 송은이·김숙이 량송량숙이라는 부캐로 량현량하의 '학교를 안 갔어'를 패러디한 '시집을 안 갔어'라는 노래를 부르는 걸 본 적 있다. 재미있는 콘셉트와 가사에 노래는 또 왜 그렇게 잘 부르는지 깔깔거리며 보았다. 센스 있고 유머러스하게 풀었지만 근본에는 흔히 '결혼 적령기'라 부르는 시기를 지난 여성이 '결혼 안 한 게 왜?'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결혼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쉰 살에 할 수도 있는데 너무 주어진 틀에 맞춰서 스스로를, 주변 사람을 옥죄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 은행나무처럼 그냥 제 속도가 있으려니 해주면 안 될까.



홍경자, 빈 그릇 하나     


이 세상에 태어나며

받아든

보이지 않는 빈 그릇 하나     


이마에 땀 흘려 물 주고 잡초 뽑으며

자신만의 색깔과 향과 모양으로

정성껏 멋스럽게 가꾸어가는 인생살이     


깡충거리는 토끼

엉금거리는 거북이 부러워 않고

자신의 속도를 즐기며 채워가야 하는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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