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시 직업기초능력검사를 마치고 2교시 인성검사를 앞둔 쉬는 시간이었다. 총알처럼 지나간 직전의 50분을 돌이켜보건대, 100에 수렴하는 확률로 일주일 뒤 합격 조회 창에서 ‘귀하의 높은 역량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멘트를 보게 될 것이다. 왜 풀리지 않는 계산 문제에 집착해서 뒷 문제들을 놓쳤을까. 빨리 풀 수 있는 문제부터 풀고 돌아왔어야 하는데. 붙잡고 있던 문제도 결국 풀지 못해 찍고, 뒷 문제는 시간이 없어 아예 손도 대지 못한 채 서둘러 빈 OMR칸 중 아무 번호에나 검은 사인펜을 긋고 제출해버렸다.
허망함과 함께 허기가 몰려온다. 주말 아침 7시에 일어나(아 물론 백수에게 주말 혹은 아침 혹은 주말 아침이란 개념도 없고, 딱히 의미도 없다.)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이 정도면 서울 횡단 아닌가) 이동해 추위와 긴장 속에 50분을 보내자 맥이 탁 풀린다. 11시다. 배고플 만도 하지. ‘나는 밥 먹을 자격도 없다’ 생각은 하는데 또 동시에 ‘배고프다.’ '또 떨어진 건가, 나 이제 뭐 해서 먹고살지' 싶어 막막한데 '점심 뭐 먹지'하는 생각이 원플러스 원처럼 딸려온다.
2교시 시험이 끝나고 순차 퇴실을 기다리는 동안 반납했던 핸드폰을 다시 켜고 근방 쿠기 가게를 찾았다. 방금 시험을 치른 자라면 인터넷에 올라온 후기를 찾아본다거나, 헷갈렸던 문제 정답을 검색해봐야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나랑 관련 없는 시험이 되었으니까. 내가 본 고사실에 20명, 이 고사장의 고사실은 32개, 여기 말고도 몇 개의 고사장이 더 있고, 내 직렬의 최종 채용 인원은 6명. 시험을 아주 잘 봐도 될 똥 말똥인데 문제의 정답을 랜덤으로 제출해 버린 내게 기회가 올 리 없다.
검색해보니 마침 도보 4분 거리에 꽤 유명한 쿠키 가게가 있다. 기분은 바닥으로 꺼질 것 같이 한 없이 우울한데 발걸음은 쿠키 가게로 향한다. 딱 2개만 사려고 했는데 자제하고 또 자제해서 4개를 샀다. 13500원. 밥값보다 쿠키 값이 더 비싸다. 내 앞에 주문한 손님은 진열대를 가리키며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요, 그리고 아랫줄도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하고 쿠키를 한 아름 가득 들고나갔다. 와 저 사람은 대단한 밥값을 하는, 밥값을 넘어 디저트 값까지 하며 사는 인생일까. 과연 밥값 하는 게 어떤 걸까. 적어도 내 밥벌이는 스스로 해야 한다는 뜻이겠지. 밥벌이 없는 어른의 어깨가 괜히 더 쪼그라든다.
“이것도 못 하면 넌 밥 먹을 자격도 없어” 어릴 때 어른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인데, 생각해보면 참 비인류적이며 혹독한 말이다. 사람이 사는데 꼭 필요한 게 음식인데 뭐 밥 먹는데 자격까지 필요하다는 말인가. 게다가 미성년자를 밥으로 협박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 인간적으로 밥 가지고 저런 말은 하지 말지 하는 반감이 든다. 그렇다고 정말 굶긴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서러운 기억이 남은걸 보면 어린 마음에도 밥은 소중했나 보다. 나 자신만큼은 내 밥에 조건을 걸지 말아야지, 힘들수록 더 야무지게 챙겨 먹어야지 다짐한다.
집에 가는 길, 3월 중순 어느 주말 정오 무렵은 햇살도 따스하고 미세먼지도 없다. 오늘 시험 보러 간 학교 정원 매화나무에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했다. 올봄 첫 꽃은 시험장에서 보게 됐다. 밥값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어린이는 30대가 되어서도 제 밥값은 못 하고 있지만, 괜찮다. 밥 먹을 자격은 없어도 쿠키 먹을 자격은 있으니까. 집에 가서 따뜻한 홍차 한 잔에 쿠키 조져야지. 그렇게 생각하면, 다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