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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Feb 22. 2023

해골물 대신 바게트

나는 내가 행복해지길 바라

해골물 대신 바게트를 자르며

  요즘 허기가 지기 시작하면 정신을 못 차리고 먹는 버릇이 생겼다. 좋아하는 빵집에서 사 온 천연발효종 바게트를 반으로 갈라 버터를 바르고 잠봉뵈르 햄을 끼워 저녁 식사를 할 생각에 들떠서, 허기짐을 참지 못하고 급하게 빵 칼로 바게트를 자르다가 그만 일이 터지고 말았다. 


 왼쪽 엄지 손가락에 통증이 느껴짐과 동시에 새빨간 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빨리 먹고 싶어 서두르다가 칼에 손을 베인 것이다. 손가락을 세게 눌러 지혈하면서도 빨리 피가 멎어 밴드 붙이고 빵을 먹을 생각만 했다. 아픈 와중에도 거실에 켜 둔 텔레비전과 덩그러니 놓여 있는 빵에 자꾸 마음이 가는 나를 정말 어찌해야 할까.


 빵 칼은 생긴 건 별로 위협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데 예상보다 날카롭다. 아마도 케이크를 사면 주는 플라스틱 빵칼과 비슷하게 생겨서 그렇게 느끼는 것 같은데 사실 무척 강한 녀석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상처가 깊어 결국 꿰맸다.




 붕대를 감은 엄지 손가락에 마취가 풀리면서 통증이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긴 하지만 엄지 손가락 말고 왼 손바닥이나 검지나 중지를 써도 엄지손가락이 당기고 아프다. 나의 경우 움푹 파인 상처를 봉합하기 위해 양쪽 살을 당겨서 꿰맨 형태라 더 그랬던 것 같다. 결국 왼손은 쉬면서 회복할 수 있도록 오른손으로만 생활해야 했다.


 가장 불편한 것은 손에 물이 닿는 일을 할 때다. 하루에도 열 번은 넘게 발생하는 손 씻기 작업은 엄지 손가락에 물이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씻어야 하고, 한 손 샤워는 시간은 배로 드는데 뭔가 개운하지는 않다. 머리 감을 때, 특히 뭔가 왼쪽 옆 정수리 안쪽에 샴푸가 전혀 닿지 않은 느낌인데 이리저리 팔을 뻗어 노력하다가 결국 자신과 타협하고 그냥 물을 열심히 뿌리고 말아 버린다. 샤워를 마치고 몸의 물기를 닦을 때에 왼손을 사용하지 않고 오른쪽 팔을 닦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오른손에 쥔 수건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쿨하게 오른팔이 젖은 채로 옷을 입었다.


 혼자 끙끙거리면서 샤워를 하는 20여분 내내 왼손은 손가락이 하늘을 향하게 가지런히 펴서 귀 옆까지 올려 물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했다. 자연스럽게 팔은 90도 정도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고 보니 내 손동작이 불교의 ‘수인(手印)’ 중 특정 동작과 비슷하다. 수인은 부처님의 손 모양을 나타내는 말로, 손 모양에 따라 전하는 의미가 달라진다. 


 찾아보니 내가 요즘 샤워할 때마다 하는 선서하는 것과 비슷한 이 자세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이라 한다. ‘시무외’는 ‘두려움이 없음을 베푼다’라는 뜻으로, 모든 중생에게 무외(無畏 없을 무, 두려워할 외)를 베풀어(施 베풀 시) 두려움에서 떠나 온갖 근심과 걱정을 없애 주는 수인이다.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모습이다. 다섯 손가락을 편 상태에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손 전체를 내린 ‘여원인(與願印)’과 손의 상하 방향이 반대다. 상징성이 시무외인과 비슷한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합쳐 통인(通印)이라 한다.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왼),  금동여래입상(오) 자료출처:국립중앙박물관


 익숙한 불상 중에서도 이 동작을 찾을 수 있다. 위 사진의 백제의 백제마애불상, 통일신라의 금동여래입상의 손모양을 살펴보면 명확한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무교로,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어쩐지 이 동작이 기분이 좋아지고 안심이 된다. 사람들의 두려움을 없애 마음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한다는 의미라니. 짝꿍인 여원인은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뜻이고. 어쩌다 보니 감히 부처처럼 하루에 20분씩 시무외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그런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거울 속 나뿐이니 자신감 없고 세상에 두려운 것 천지인 나 자신에게 20분 동안 스스로를 믿고 걱정과 근심, 고통과 불안을 없애 편하고 행복해지라고 주문을 외는 모양새가 되었다. 나 자신의 부처가 되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작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빛의 향연-예산 수덕사 괘불> 전시를 보며 수인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박물관을 떠나는 순간 깡그리 잊고 말았다. 그런데 이렇게 또 수인에 대해 찾아보고 공부하게 되다니. 이번에는 그 뜻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세상은 참 요지경이다. 손을 다쳐 불편하고 우울한 와중에도 이렇게 재미나고 유익한 일이 생기니. 원효대사 해골물처럼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구나. 




*수인 관련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고했습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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