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자동차 회사 엔지니어 경험담
다국적 기업(多國籍企業, 영어: Multinational corporation 혹은 Transnational corporation; 약자: MNC 혹은 TNC)이란 일반적으로 여러 나라에 걸쳐 영업이나 제조 거점을 두고서 국가나 정치적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세계적인 기업을 가리킨다. 다국적 기업은 시장, 기술, 경영 방법의 국제적 공동화를 이룬다. 이러한 다국적 기업의 일반적인 경향은 국내 기업 활동과 해외 활동의 구별이 없으며, 중요시하는 게 그 기업의 이익이며, 이익 획득을 위한 장소와 기회가 있으면 언제 어디로든 진출한다. 따라서 본국에 거점을 둔 본사와 각 거점은 모두 독립적인 이익 관리 단위의 성격이 있으며, 그 이익을 거점 자체의 경영 충실화를 위하여 현지 재투자를 원칙으로 한다. - 위키백과사전
지방 국립대를 졸업한 나는 지난 학창 시절 휴학을 통해 얻은 값진 경험인 10개월간의 해외 어학연수를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난생처음 겪은 낯선 장소에서 만난 나와 같은 청년들의 자유분방한 사고와 합리적이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의 삶-그렇지만 개인의 책임을 전제로 한-에 나의 의식은 매료되었다. 우리라는 공동체보다는, 나라는 주어가 일반화되어 있어 내가 행복해야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던 그곳에서 나는 대학 졸업 후의 삶의 설계도를 청춘을 그려나갔다.
사랑(영어: love)은 깊은 상호 인격적인 애정에서 단순한 즐거움까지를 아울러서 강하며 긍정적으로 경험된 감정적 정신적 상태이다. 즉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모성애, 가족, 또는 연인에 대한 사랑을 들 수 있다.-위키백과
뉴질랜드 푸른 하늘 아래 철부지 부산 촌놈의 가슴을 하염없이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눈이 부시도록 새하얗고 아름답게 반짝거리던 스무 살 시절 우리는 사랑을 했다. 천국의 실체를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렬하였으며 냐 인생의 전환점이 된 그 시간은 목적을 잃은 망망대해의 배처럼 정처 없이 떠 돌던 내 마음에 인생의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매일 내가 지켜주고 싶은 사람과 함께 꿈을 꾸었고 그 꿈속에서 영원을 보내고 싶은 나의 바람은 간절함과 만나 이루어졌다. 매일매일이 깨고 싶지 않은 꿈이 되어.
당시 IMF 여파로 국내의 취업 경기가 좋지는 않았지만 아내를 만난 후 대학 4학년을 진심으로 보내고 그 어렵다는 4학년 1학기 장학금을 타 낸 나는 공과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대기업의 공장들은 대부분 지방에 있었고 내가 소신 지원할 경우 지방에 위치하는 기업체 사원으로 경력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아기씨와 꿈을 꾸었던 나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하는 것이 국내 굴지 기업에 취업하는 것보다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나의 첫 직장은 서울과 가장 가까운 직장인 청주에 있는 독일계 자동차 부품회사인 Siemens VDO가 되었다. 입사하자마자 다국적 기업이 제공하는 글로벌 경영 방침과 생산적인 업무 시스템은 브랜드 정체성이 제공하는 국제적인 인지도를 통해 나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었고 그에 상응하여 제공되는 급여와 복리후생은 국내 대기업보다 상대적으로 높았던 탓에 나의 사회생활의 시작은 성공에 더 가까이 다가간 듯 보였다. 다국적 기업답게 영어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독일 본사의 엔지니어와 화상통화 혹은 미팅을 진행하고 선진화된 기술을 국내 자동차에 적용하는 연구활동을 통해 자연스레 나의 자존감은 높아져만 갔다. 그에 더해 국내 기업에 비해서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열린 조직문화와 능력위주로 평가되는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업무 몰입도의 향상은 나에게 적지 않은 동기부여를 제공하였으며 그렇게 쌓은 나의 첫 경력으로 2006년 11월 프랑스계 다국적 자동차 회사로 2번째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쌓은 경력으로 2008년에는 일본 회사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개발되고 양산하였던 기존 차종의 단종을 선언하고 프랑스 본사와 협력하여 신규 차종의 설계를 공동으로 시작하였고 연구개발팀에 속해있었던 나는 그 해 4월에 6개월 간 프랑스로 장기 출장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외국 출장을 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상 업무에서 늘 영어를 사용하고 본사 직원들과 잦은 업무 미팅을 하던 나였지만 정작 첫 해외근무의 시작은 외국계 회사에서 사회생활 시작 후 5년이 흐르고 나서였다는 것이다. 회사 내에서도 흔하지 않은 기회를 얻은 나는 그렇게 파리지앵들과 함께 프랑스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었다.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에 도착한 날 맡은 도시의 탁한 냄새는 아직 추억 속에서 잊히지 않는다. 비행기가 만들어내는 매연과 도시의 건조한 공기가 만나 만들어 낸 낯 선 냄새와 거대하기만 했던 공항에 나는 순간 압도되었던 것 같다.(당시엔 김포공항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공항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서 풍겨 나는 어색한 채취를 통해 이 공간은 한국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곳임을 자각하게 되었고 늦은 밤에 공항에 도착한 출장팀은 본사에서 나온 프랑스 직원과 함께 6개월간 머물게 될 숙소로 이동하였다.
도로에는 우리나라의 도시에 비해 많은 스쿠터가 속도감 있게 활보하고 있었고 생각보다 많은 수의 비율을 차지하는 경차들이 달리는 도시의 도로를 보면서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선진국 프랑스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30여 분을 달려 도착한 숙소는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레지던시 호텔’이라 불리는 곳으로 당시 국내에는 없던 콘셉트의 숙소였다. 3성급 호텔의 품질과 서비스를 지니고 숙소 내에는 장기 체류가 가능하도록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간이 주방과 식탁 등의 편의시설이 객실 내에 제공되는 호텔이었다.
지금이야 해외를 나가도 거의 모든 공간에 wi-fi가 일반화되어있지만 2008년 당시 프랑스의 인터넷 수준은 숙소와 별도의 계약 체결을 통해서 가능했고 비용을 지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호텔에서 제공하는 인터넷의 속도는 우리나라의 그것과 비교하면 형편없이 느린 것도 사실이었다. 현재의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편의를 누릴 수 없었던 당시의 기술로 가능한 것은 회사 노트북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인 skype라는 앱을 통해서 가족과 영상통화를 시도해서 운 좋게 연결되면 좋은 것이고 안되면 채팅을 통해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정도였다. 그런 안타까움이 만들어내는 안절부절못함과 프랑스와 한국의 경도 차가 만들어내는 시차는 평소 일상을 통해 바래졌던 가족의 소중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깊은 교훈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