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얼 전화기에서 5G 휴대전화까지 그와 함께 사라지는 갬성
통신(通信)은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우편, 전신, 전화 등의 매체를 사용하여 정보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방송이나 신문과 같은 대중 전달도 통신에 해당하나 좁은 의미에서는 직접적인 의사소통, 우편물과 전기통신과 같은 개별적 전달을 통신이라 한다. -위키백과사전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놀다 보면 하루가 너무나 짧아~ 어린 시절 우리의 통신 수단은 단순했다. 동네 친구 집 앞에서 동네가 떠나갈 듯 큰 소리로 “개똥아~ 노올자~” 이름 부르기 아니었을까? 당시 국민학교에서 만난 친구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종이컵 두 개에 실을 연결하고 줄을 팽팽하게 당긴 후 컵과 컵 사이를 주고받던 개미 대화도 생각난다. 그 시절 실을 통해 전달되는 아날로그 신호는 어린 시절 우리의 달팽이관을 간지럽혔다.
다이얼 전화기가 보급되기 전에는 마을마다 한 분씩 계시다는 유지들 집에 전화기가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급한 일이 있을 때면 전화기가 있는 마을 어르신 댁으로 가서 귀한 소식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러한 기억이 없는 나는 이 시대의 꼰대남이 가진 가장 먼 기억을 더듬어 최초의 제대로 된 통신수단을 떠올려 본다.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고학년이 되면서부터였을까? 집에 울리는 전화기를 통해 나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기 시작했던 건. "여보세요~ 어? 누구라고? 순이? 어 그래.. 잠깐만 기다리그라이!" "개똥아~ 전화받아라. 순이라는데? 순이가 누고?" 전화기라곤 거실에 놓여 있던 전화기 한 대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얼굴에 불이 난 듯 발갛게 달아오른 채 잽싸게 엄마로부터 넘겨받은 전화기. 모든 가족의 눈은 티브를 향하고 있고 나의 대화에는 관심도 없었겠지만 거실에 한 대 뿐인 전화기가 그렇게도 얄미운 적은 없었다. "어~ 알았다! 거기로 갈게 내일 봐~." 개미 성대모사 수준이던 목소리로 전화를 끊는다. 당시의 통신수단이었던 집전화기는 디지털 방식이 아닌 아날로그 방식이었다. 0에서부터 9까지 구멍이 나 있는 다이얼이 전화기 중앙에 위치하고 구멍을 시계방향으로 돌려서 번호를 입력하면 번호가 만들어내는 원주의 길이에 따라 할당된 번호를 인지하는 방식으로 그 번호의 대상인 상대방의 전화로 연결되었다. 당시에는 별도의 저장 수단이 없던 까닭에 친한 친구들의 전화번호 정도는 5~6개 정도는 머릿속에 저장이 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 외에는 종이 수첩에 빼곡히 적혀있는 이름과 전화번호 책자들을 찾아보아야 했던 기억이 있다. 메모장의 겉표지는 남색인 경우가 많았고 그 안은 모나미 볼펜으로 빼곡히 적혀있는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그 번호들을 담아낸 동그라미들. 그리고 그 곁에 놓여있던 엄청난 두께의 전화번호 책. 전국의 모든 사람들의 번호가 그 책 안에 담겨 있었다.
5-5-6-6-5-5-3, 5-5-3-3-2, 5-5-6-6-5-5-3, 5-3-2-3-1 (이것이 무엇일까? 아는 사람은 꼰데파 임원의 자격이 있다!)
다이얼 전화기의 보급이 끝날 무렵 도시에는 버튼 식 전화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다이얼식 전화기의 아날로그 감성은 다이얼 전화기가 들려주는 멜로디 소리에 그 자리를 넘겨주고 말았다. 0부터 9까지 그리고 별표(*)와 샵(#)을 포함하여 총 12개의 신호를 가진 버튼식 전화기는 0을 누르게 되면 건반의 '도(do)' 음이 9를 누르게 되면 한옥타브 '도(do)'음이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위의 번호를 차례차례 누르게 되면 '학교종이 땡땡땡' 이란 동요를 연주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서 도레미가 계속 반복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추측한다.(아마도 똘똘한 친구들은 소리를 통해서 번호를 역추적 가능했으리라. 누군가는 그 정보를 이용해서 정의롭지 못한 의도를 가졌을 테지.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지금은 동요를 연주할 수 없다. 이건 순전히 나의 뇌피셜이다.) 방금 나의 아이폰을 켜고 눌렀는데... 레레미미레레미레레미미레....ㅠㅠ
시간은 흐르고 기술의 발전과 함께 ‘바텔’이라 불리던 국민 무선전화기가 집으로 입고되었다. 전화번호는 하나이지만 거실에서 울리는 유선전화기 한 대와 각 방마다 있던 무선전화기 두 대가 합쳐진 것이다. 그렇게 거실에서 전화를 받은 사람이 방에 있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넘겨주면 편안하게 방 안 침대에 누워서 무선 전화기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드. 디. 어. 온 것이다.
무선전화기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배터리가 소진될 때까지 친구와 전화기를 붙잡고 전화하던 시기가 있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험난한 세상을 버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친구다.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실로 중요했으며 특별한 주제도 없는 이야기에 하늘이 떠나갈 듯 웃고 떠들던 그 시절에 우린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내일 다시 볼 것을 약속하고 집으로 가서는 무선전화기를 들고 방 안으로 기어들어갔고 내일이면 볼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본체인 유선전화기에 연결된 무선전화기는 1대에서 심지어 3대까지 연결될 수 있었고 방이 3개였던 우리 집은 거실에 유선전화기와 나머지 방들에 무선전화기가 각각 있었다. 거실의 전화기가 울리면 방에 있는 무선전화기들이 메아리처럼 울렸고 걸려온 전화를 먼저 받은 사람이 임자가 되어 수신자에게 전화를 넘겨주게 되는데 이때 전화기를 넘겨주고 유선전화기의 수화기를 들고 있게 되면 도청이 가능하다. 친구와의 은밀한 공간 어딘가에 어렴풋이 포함되어 있는 숨소리에 "형! 전화기 끊어~!"라고 무선전화기의 송신기를 손으로 부여잡고 외쳤던 기억이 난다.
이동통신의 시대 개막 '삐삐(beeper)'
그 시절 나는 행운아였다. 할머니가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로 손주에게 015로 시작하는 고유번호를 가진, 한 손에 들어오는 물방울 모양의 기계 즉 삐삐를 선물해주셨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에 불과했던 나에겐 그 선물은 별 볼일 없던 나를 지금 언어로 ‘인싸’로 만들어 줄 수 있을 만큼 귀한 아이템이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그 ‘삐삐’와 함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나갈 여자 친구만 있으면 게임은 시작될 터였다. 삐삐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의 모바일폰과 같이 고유의 번호가 있고 그 번호에 전화를 걸면 두 가지 옵션이 있다. 1번의 경우는 연락받을 전화번호를 남길 수 있고 2번의 경우는 나의 목소리를 녹음하려 상대방의 삐삐에 음성을 남길 수가 있다. 빨리빨리(8282), 영원히 사랑해(0024, 0404)와 같이 번호로 남기는 짧은 메시지를 통해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던 시절에 우린 사춘기를 보냈다. 당시에 삐삐는 양방향 소통은 아니지만 상대방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고 서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 중에서는 제일 진보한 기술이었다. 삐삐를 가진 탓에 한 동안 나는 주위 친구들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랑의 전령사 역할을 했던 기억만 있다. 내 꺼아닌 내 꺼 같은 너~ 그렇게 호황기를 누린 삐삐는 그렇게 4~5년 간 호황을 누리다가 점차 그 자리를 다른 혁신적인 기술에 넘겨주게 되었지만 삐삐가 주는 설렘의 감정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 푸근하고 설레는 청춘의 추억들을 선사한다.
카폰, 시티폰, 모바일폰을 거쳐 오늘날의 스마트폰까지
어느 날 같은 반 친구 아버지의 차에 전화기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동차 안에 위성 신호가 연결되어 있으면서 달리는 차 안에서 전화 통화를 할 수가 있다는 사실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거 같다.
그 후로 한두해 시간이 흘렀다. 1996년 어느 날 여느 건강한 남자들처럼 나에겐 국방의 의무가 주어졌고 강원도에서 군 복무가 시작되었다.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기 위해 머물던 임시 거처에서 가족과의 외출이 허락이 되었다. 멀리 부산에서 춘천까지 가족이 면회를 왔고 나는 어느 모텔을 빌려서 부모님이 싸 들고 오신 맛있는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형이 갑자기 “전화할 데 없나?”라고 묻는다. 전화할 상대를 고민하다가 여기저기 친구들이 따 오른다고 이야기하니 형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나에게 건넨다. 그 이름 ‘시티폰’ 이란다. 가정용 무선전화기의 절반 사이즈로 휴대가 가능할 정도의 사이즈였던 그 단말기는 어디든지 전화를 걸 수 있는 착신전용 휴대용 무선전화기였다. 다만 전화를 걸기 위해서는 기지국이 필요했는데 그 매개체가 되는 신호가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형과 함께 거리로 나가 공중전화 근처로 가자 휴대전화기에 신호가 잡히더니 전화를 걸 수가 있었다. 당시에 공중전화는 시민의 통신수단이었고 통화 예절이라는 것이 있어서 무턱대고 수화기를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번화가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0/nwdesk/article/1837804_30435.html
그렇게 경험한 시티폰이란 문명의 이기가 지금의 무선 휴대전화기로 발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2년이 넘은 복무 기간 후 나는 전역 선물을 소대원들에게 받았고(일종의 선물 타기 계와 같다.) 그것은 올림픽 오륜기 로고가 박혀있는 삼성 휴대폰이었다. 검은색의 플라스틱으로 구성된 바폰으로 원폴리 단선율 멜로디로 노래하고 녹색 조명이 나오는 작은 화면을 가졌으며 흑색의 글씨가 문자와 수신 정보를 액정화면에 제공하는, 삐삐와 시티폰이 합쳐진 문명의 이기였다.(기지국은 광역시와 도시에 깔렸다.)
오늘날에는 휴대전화기의 명칭이 어느 순간 휴대폰에서 모바일폰을 거쳐 스마트폰으로 바뀌게 되었다. 통신기술과 함께 기술 혁신을 통해 전자 부품들은 더 작아진 크기에 더 많은 정보와 기능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초기 모델은 손바닥으로 가리기 힘들 만큼 크고 튼튼해서 가끔씩 튀어나온 못을 박아 넣을 수 있기도 했다. 몇 번을 떨어뜨려도 기능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만큼 튼튼했고 겉에 뭍은 먼지를 툴툴 털고 다시 사용하면 될 정도의 내구성을 갖춘, 말 그대로 통신수단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수단에 불과하던 휴대전화기는 세대를 거치기도 전에 나노테크의 제조기술과 함께 ‘손 안의 작은 세상’을 만들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무엇이든 가능할 것만 같은 세상인 오늘날 스마트폰은 그 상상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되어가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되었으며 반경 4900킬로미터가 넘는 세상은 스마트폰 크기만큼이나 작아졌다. 원하는 정보가 있다면 사람들은 주머니를 뒤져 손바닥만 한 크기의 단말기를 꺼내 작은 화면에 대고 키워드를 입력하기만 하면 작게는 수 백개에서 많게는 수천수만의 정보를 검색해준다. 앞으로 다가 올 세상은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상상조차 힘든 급변의 시기에 살고 있다.
"삐 소리 후 음성 녹음은 1번, 전화번호를 남기시려면 2번을 눌러주세요" 그녀의 삐삐 너머로 안내 맨트가 울리자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1번을 누른다. "음.. 난데 음성 남긴 지 10분이 지났는데 어디인 거야? 왜 연락이 없는 거야? 이 메시지 들으면 빨리 전화 줘~" 10분째 연락이 없는 그녀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를 애타게 기다리는 나.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내 맘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해보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불안한 상상들은 나의 마음을 더욱더 불안하게 만든다. 불안함은 걱정으로 바뀌고 언제라도 그녀의 집 앞으로 달려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 내 손의 삐삐가 힘차게 울린다.
"개똥아~미안해.. 나 엄마랑 목욕탕 다녀오느라.. 삐삐 들고 가는 거 깜박했어~~ 10분 이따가 전화해도 되지? 이따 봐~.” 두 시간의 기다림과 불안함은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 몇 초에 눈 녹듯 녹아내리고 나의 마음은 10분 후에 만나게 될 그녀와의 통화시간을 기다린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2021년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효율적인 로맨스가 그 시절에는 나를 포함한 많은 선남선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그러한 긴장감은 두 사람의 감정을 더욱 굳건하게 이어주는 버팀목이 되기도 했다. 때론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건 지금의 우리에게 주어진 문명의 이기가 전해주는 편안함이 우리도 모르게 앗아가고 있는 갬성, 휴메니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감성이 인류에게서 사라질 때쯤 우리의 역사와 이야기는 끝이 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난 오늘도 어김없이 스마트폰을 열어 세상을 검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