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한 멀티태스커 티코들
2024.11.21. (목)
오랜만에 Escazú 사무실로 출근했다. 새벽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오기 전 향수를 뿌리니 한국에서 아침에 출근 준비를 마치고 같은 향수를 뿌리고(후각이 예민해서 향 때문에 때문에 깬 엄마에게 한소리 듣고) 마곡 가는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달리던 날들이 떠올랐다. 센트럴까지 버스를 타고 가고, 거기서 또 사무실까지 다니는 셔틀을 타야 하는데 15분 뒤 차를 기다리기 싫어서 떠나기 직전의 차를 탔더니 출근길 내내 서서 가야 했다.
오랜만에 Escazú에 왔더니 처음 코스타리카에 왔던 날들이 생각나면서 그 몇 달 사이 감정적으로도 상황적으로 달라진 부분들이 더 와닿았다. (아니 사무실이 이렇게 오랜만에 오니 이런 느낌이군.. 하는 공간으로 다가오는 게.. 맞나요?) 또 사무실 곳곳에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들이 가득해서 더 낯설게 느껴졌다. 자리마다 크리스마스 양말도 달려있었는데 안에 캔디들이 있었다. 아빠에게 사진을 보내니 당연히 내가 달아놓았다고 생각했는지(매년 방문 앞에 달아놓고 한 달 내내 여기 빨간 양말 있네~눈치를 주곤 했다.), 우리 딸 여전하네 아빠가 가서 선물 넣어줘야 하는데~하셨다. 아니 내가 단 것 아니라고요. 자리엔 회사 셔츠도 놓여있었다. 언제 사이즈 취합해 간 건데 이걸 이제 주지 싶었지만 괜히 크리스마스 분위기 속에 책상 위에 뭐가 놓여있으니 기분이 좋기도 했다.
오늘도 여전히 조용한 사무실에서 스페인어 수업을 들으려니 쉽지 않았다. 오늘은 사람 외형을 설명하는 것을 연습했는데 아주 쬐깐한 스페인어로 고요한 사무실에서 스스로를 묘사하는데 점점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러다 재채기를 했는데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거기에 화면 속 아르헨티나에 있는 선생님까지 salud! 하길래 너무 웃겨서 한참을 웃다가 gracias 했다. 아니 제 스페인어 yo.. soy.. no.. 아니지 no.. soy.. alta.. 이러고 있는 거 다들 듣고 계셨다는 거잖아요?
수업이 끝나고 늦은 점심을 먹고 일 좀 하려니까 같은 동네 사는 아래층 동료 중 한 명이 퇴근하려는데 혹시 지금 괜찮으면 같이 가자고 팀즈 메시지를 줬다. 아니 지금 3신데요.. 너무 좋지. 같이 차 타고 집에 가는데 갑자기 스페인어로 말하기 시작해서 눈물이 찔끔 났다. 오늘은 진짜 더 이상 못하겠어서 잉글레스, por favor. 해서 숨을 좀 돌리고 (스페인어에서 피신한 곳이 영어라니..) 집에 가는데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더니 뒤에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 레어템 아닌가, 무지개다!!!! 했더니 친구가 진지하게 한국엔 무지개가 없어? 질문했다. 아니 있는데.. 무지개는 무지개잖아! 했더니 여기선 무지개를 가리키면 무지개가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 순간 진짜 무지개가 사라졌다.
항상 여러모로 챙겨주는 이 회사 동료는 막연히 나이가 나보다는 많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내 남동생과 동갑이었다. 그리고 학부 졸업도 안하고 일을 하다가 이번 가을에 졸업을 한 것이었다. 다른 회사에 다니는 친구도 자기 팀장이 얼마전에 학부 졸업했다는걸 보니까 대학 졸업장은 정말 말로만 들었던 것보다도 더욱 의미가 없나보다.
그 동료는 심지어 지금 갖고 있는 법 학위 외에 커뮤니케이션 학위도 하나 따겠다고 대학을 다시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달 졸업 전까지는 1) 법학과 학부 생활 2) 커뮤니케이션학과 학부 생활 3) 변호사 시험 준비 4) 회사일 5) 사내공모로 부서이동 준비까지 하고 있던 것이다. 여기에 연애에, 수영 수업에, 가끔 행사MC까지 보러 다닌다.
같은 건물 스무살 친구도 1) 학부 생활 2) TCU 조교일 3) 은행 인턴십 세 가지를 병행하고 연애, 운동까지 더해서 하고 있었는데 코스타리카..더 이상 여유롭지 않은데 나만 여유롭게 살고 있는 것일지도..?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들 나보다도 훨씬 어린데도 여러가지 일을 한 번에 소화하고 있었다. 나도 더 어릴 땐 오히려 이 일 저 일 다 찾아서 병행하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집에 돌아와 한국 전 회사분들이랑 한참 이야기를 했다. 고과 오픈 이야기부터 임원 발표, 조직 개편, AI 등급, 인센 이야기까지. 뭔가 먼 이야기 같으면서도 그 바이브가 당장 생생하게 느껴졌다. 당시에 모든 것을 겪을 땐 마냥 흥미롭고 재밌었는데 여기 와서 그 에너지를 잃은 건지 내가 이 과정을 다 겪어야 했다면 너무 피곤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당장 내년 이맘때면 다른 회사에 들어가서 비슷한 일을 겪어야 할 가능성도 높은데, 이래도 되는 건가? 아마 곧 사무실 자리 이동과 레이아웃 공사가 있을 테니 또 짐을 싸고 1년이 이렇게 빠르게 흘렀다니 이렇게 쭉 사는 게 맞나? 생각하겠지. 자리의 스노우 글로브들을 치우면서 화려한 옆 사원 자리랑 묶여서 책임님들이 이거 인형에, 피규어에, 이거 다 짐 언제 어떻게 다 싸요~ 한 소리 하시면 흥 잘 싸면 되죠 하다가 결국 마지막 날 다들 도와주시고 했겠지.
잠깐 잠들었다가 저녁 요가 수업을 다녀왔다. 오는 길에 이번 주말에 위키드 보러 가서 먹을 팝콘을 사 왔는데 역시나 집에 와서 저녁 대신 팝콘을 다 먹어버렸다. 이럴 줄 알았어. TCI 검사 다시 하면 인내력이 그렇게 높게 나오지 않을지도 몰라. 그냥 100일 기념 팝콘이라고 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