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카페에서 사기당할 뻔한 썰 푼다.
2024.11.27. (수)
너무너무 덥다고 하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한국은 이제 너무너무 춥나 보다. 오늘은 심지어 첫눈이 내렸다고 했다. 인스타 피드가 눈 내린 한국 사진으로 가득하다. 아빠도 창문 밖으로 집 앞에 눈이 가득 쌓인 사진을 찍어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우리 회사가 이렇게 예뻤던가, 우리 집 앞에 이렇게 예뻤나, 한국이 이렇게 예뻤나? 무한 스크롤링을 하며 연구소에 도착했다. 마침 1층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Let it snow라는 문구와 함께 놓여있는 눈사람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에 야자수 나무들도 함께. 오늘 나름 추운 것 같아서 한국에서 챙겨 온 옷 중에 가장 두꺼운 옷을 꺼내 입었는데, 날씨 어플을 확인해 보니 20도였다.
사실 이 장식도 몇 주 전부터 있었던 건데 오늘 시험 보려니까 괜히 별게 다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와중에 오랜만에 만난 연구소 동료가 본인 조카를 연구소에 데려왔다. 시험 직전에 어떤 마음이었냐면, 방금 태어났지만 분명 나보다 스페인어 훨씬 잘할 이 친구에게 대신 봐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른의 체면을 지켜내고 어찌어찌 시험은 마쳤다. 아니 무슨 읽기 파트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여성 참정권에 주요한 역할은 한 인물의 일대기가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스페인어 실력보다 눈치로 알아듣는 실력이 더 빨리 늘어서, 흐름만 파악하고 답을 체크했다.
시험이 끝나고 내일 있을 oral 시험의 첫 번째 파트의 주제를 미리 전달해 주셨다. 바로 가장 최근에 다녀온 휴가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아마 여러 과거형을 쓰게 하려고 이런 주제가 나온 것 같다. 고민 없이 올해 초에 동생이랑 다녀온 일본 여행을 주제로 삼고 발표 자료를 만들고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사진을 첨부하기 위해서 당시 인스타에 썼던 일기를 찾아 읽었다. 한국에서 퇴사할 때는 연차 하루 이틀이 모자라서 추석 부가급여(인센 아님, 그저 내 연봉의 1/14)를 받지 못하고 퇴사하는 것이 너무 아쉬워서 연초에 동생이랑 일본만 안 갔어도!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지금 되돌아 보니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래도 우선 메인 시험은 끝났으니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내일 있을 시험을 준비하다가 오가며 항상 궁금했던 티코 햄버거라는 곳에 점심을 먹으러 왔다. 기본에 충실한 햄버거 맛이었다. 먹으면서 또다시 크리스마스 악몽에 빠져들었다. 크리스마스 악몽이란 연말에 갑자기 생긴 약 2주간의 휴가를 어떻게 쓸지에 대한 고민인데, 이게 또 바로 다음 주에 시작될 12월 운동과도 연관되어 있어서 고려사항이 많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옵션은 크게 1) 다른 국가에 계신 한국인 동료들과 갈라파고스 여행하기 2) 혼자 페루-볼리비아-칠레 여행하기 3) 코스타리카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뒤 국내여행하기 이렇게 세 가지였는데 이 중 2)로 기울어 여러모로 알아보다 사기를 당할 뻔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다른 한국인분들도 처음엔 페루-볼리비아-칠레 여행에 관심을 갖다가 날씨 때문에 갈라파고스로 트셨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아직 중남미에 어딜 제대로 보지 못한 상태에서 갈라파고스는 조금 더 심도 깊은 여행지로 느껴졌고 또 갈라파고스와 비슷한 곳들이 코스타리카에도 있는데 아직 여기도 제대로 보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연말시즌이니 비행기표가 평소보다 더 비싼 것도 있었다. 그렇지만 또 언제 이렇게 사무실 쉬는 날 갈라파고스를 다 갈까! 싶은 생각도 있어서 고민하며 페볼칠 여행도 계속 찾아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남미 여행 정보 카페에서 나와 동갑인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루트로 여행을 고려 중이라는 글을 보고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대화를 하면서도 미심쩍은 부분이 몇 가지 있었는데, 1) 한국에서 출발하는데 당장 한 달도 안남은 남미 여행 계획을 지금 세우는 것 2) 글에서는 유럽에서 교환학생을 해서 경험이 많다고 했는데 대화 중에는 UW에서 교환학생을 해서 영어를 잘한다고 한 점 3) 아직 루트도 제대로 안 짰는데 숙소와 투어 먼저 결정하자고 한 점 모두 이상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사촌 오빠가 투어 대리점을 하는데 국내 출발 패키지는 마감되었고 현지 참여 가능한 투어 몇 개가 있다고 했던 부분이었다. 링크를 공유해 달라고 했더니 이미 마감된 패키지라 링크는 따로 없다고 했다. 아니 그럴듯해 보이는 웹 만드는 정성 정도는 쏟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여러모로 이상해서 나는 날씨 핑계를 대고 나중에 혹시 일정이 겹치면 식사나 하자 이야기하고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 다음날 카페 공지에 회원들 간에 오픈채팅으로 대화를 금지한다는 글과 함께 피해 내용이 올라왔는데 어제 그 사람과 겹쳐 보이는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그 회원의 글만 블라인드 게시판으로 이동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90% 이상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페볼칠 여행도 기세가 꺾여버렸다. 그래서 결국 코스타리카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연말에 국내 여행을 다녀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는데, 동생이 앞뒤 이야기를 다 듣더니 딱 3번으로 그렇게 해라! 정해줬다. 그 말이 뭐라고 갑자기 마음이 너무 편해진 것을 느꼈다. 내가 이미 정해놓은 답이 있는데 누구한테 그걸 한 번 더 듣고 싶었던 것이구나 깨달았다. 빨리 내일 시험 끝내고 12월 운동 먼저 제대로 찾아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