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했다고 벌써 연말
2024.12.06. (금)
2024년은 이직 준비 과정도 있었고, 이후 퇴사에, 출국에, 새로운 나라에 정착하는 과정까지 가득 담은 한 해였는데도 뭐 했다고 벌써 연말이지? 하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온 것을 보니 이건 그 한 해가 어땠는지랑 크게 상관없이 항상 따라오는 감정인가 보다. 작년 이맘때는 팀장님 없이 보낸 한 해를 마무리하며 새로 오실 팀장님과 조직개편 이야기로 한 해를 마무리했던 것 같은데 고작 12개월 사이에 너무 달라진 지금 나의 상황과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그러다가도 전 동료들과 카톡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5분 만에 그때 그 자리에 앉아있는 기분이 들고는 한다. 올해 우리 팀 마무리 회식을 한 호텔에서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년 이맘때 즈음이면 몇 달간 모아둔 조활비를 어떻게 털어 쓸지 열정적으로 토론하던 날들이 떠올랐다.
나의 올해 연말 회식은 여기 코스타리카의 한 극장이다. 송년회인데 그냥 어디 레스토랑이나 호텔도 아니고 웬 극장이지? 했는데 다른 동료들도 극장을 빌려서 송년회를 진행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어제 집까지 데려다준 동료가 오늘도 픽업해 주겠다고 해서 함께 가게 되었다. 다만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 코스타리카 타임으로 조금 혼란스러웠다. 이벤트는 저녁 5시부터라 4시 45분까지 픽업을 오겠다던 동료는 5시 15분이 되어서야 도착했고, 행사장에는 5시 45분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행사는 결국 6시 30분에 시작되었다!
오늘 행사에 참석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다른 동료가 본인이 연기를 하니까 꼭 오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주인공으로 행사 내내 연극배우처럼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스페인어 대사를 전부 알아듣지는 못하였지만 놀라울 정도로 프로페셔널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연극 사이사이에 임직원들이 둘셋 나와서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하거나 악기를 연주했는데 다들 본업인 것처럼 너무 잘했다. 엊그제 연구소의 프로젝트 담당자가 코스타리카 국가대표로 춤 대회에 나가서 1등을 한 것이 떠올랐다. 혹시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다들 본업 외에도 그만큼 자신 있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어서 그렇게 행복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상치 못한 퀄리티의 송년회 무대를 보고, 밖에 크리스마스를 테마로 꾸며진 테이블에 앉아 코스 요리 식사를 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 간단한 스페인어 대화를 할 수 있어서 뿌듯했다. 그 사이에 아까 연극하던 극장은 클럽처럼 꾸며져서 옆에서는 술을 만들어주고 다른 한쪽에서는 DJ가 노래를 틀어줬다. 이때 사실 조금 도망가고 싶었지만 정신 차려보니 한 손에는 술을 들고 두 발은 무대에 서있었다. 술을 주문할 때는 보드카, 위스키, 테킬라 등 본인이 원하는 베이스와 위에 얹을 재료를 요청해야 했는데, 술에 대해서는 전혀 뭐가 뭔지 모르는 나는 대충 아무거나 골랐더니 아주 강한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리고 무대에서는 이번주에 찔끔 배운 춤을 같이 추니까 동료들이 다들 eso eso 해줬다. 하하.
그렇게 한참 재미있게 놀다가 10시가 되니까 갑자기 노래가 끊기고 해산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보통 밤새도록 이렇게 춤을 추고 노는데 올해는 장소 대여 이슈 때문에 10시까지만 회사에서 책임지고 이후로는 각자 놀러 나가는 것 같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딱 적당한 것 같아서 이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너무 오랜만에 알코올을 마셔서인지 힘든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였는지chalupa를 만들어 먹으려고 사뒀던 또르띠야를 전부 다 먹어버렸다. 안암에서 놀 때 친구가 자꾸 술 마시고 도스마스 가서 브리또 먹고 싶다고 할 때마다 어이가 없었는데 이런 느낌이었을까. 안암에서 친구들이랑 한국어만 왕창 쓰면서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