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18. 눈 딱 감고 벌레 잡기

하지 못하면 안 될 놓이면 못할 것이 없다

by 에스더

2024.08.31. (토)


8월의 마지막 날이다. 초반에 비해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 같아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비디오콜을 하기로 했다. 시차를 감안해서 (코) 토요일 아침-(한) 토요일 저녁/(코) 토요일 저녁-(한) 일요일 아침으로 약속을 잡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대학 동아리 언니들이랑 한창 팀즈로 연결을 시도하다가 결국 구글밋으로 연결되었다. 힘들게 연결해 놓고 배경을 바꾸겠다~ 아바타를 바꾸겠다~ 시답지 않은 것으로 한 30분을 낄낄거렸다. 그리고 지난 2-3주간 밀린 이야기를 꺼내놓고 언니들은 한국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들었다. 언니 한 명도 내가 출국할 즈음에 새로운 회사에서 생활을 시작해서 여러모로 공감이 갔다. 그래도 동기가 있다는 게 부러웠다. 그것도 말이 통하는! 뭔가 세상과 아주 동떨어져서 살고 있는 기분이었는데 떠날 즈음에 마지막으로 봤던 언니들의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일상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그중 일부로 같이 굴러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새벽 시간이 되어 피곤해 보이는 언니들을 놓아주고 나니 점심이었다. 이 시간대에는 주로 사무실에 있어서 잘 몰랐는데 생각보다 방이 더웠다. 그래서 창문을 열어두고 선풍기를 켜고 잠시 핸드폰을 하다 정신 차려 보니 방에 벌레가 엄청 들어와 있었다. 여긴 거의 집 안팎의 구분이 잘 없는데 신발을 신고 다니는 건 둘째치고 한 번도 방충망이 달려있는 창문을 본 적이 없다. 사실 한국에서는 작은 모기조차 아무리 물려도 무서워서 잡을 생각은 못하는데 지금은 내가 안 잡으면 평생 이 친구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레는 머릿속으로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오싹해지지만 눈을 딱 감고 한 마리씩 잡기 시작했다. 한두 마리면 모르겠는데 여럿이 모여있어서 너무너무 무서웠지만 해내야 해! 크게 쫄아서 머리가 띵할정도였지만 한 열 마리 잡으면서 이거 core skill로 레쥬메에 넣을 정도의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은 역할 분담이 확실한데 벌레 쪽은 엄마가 담당하고 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아빠와 나는 역시 어렸을 때부터 노출되어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곤 했는데 더 효과적인 것은 그냥 잡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보는 것이었다. 스페인어..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니까 하게 되잖아!


한참 벌레를 잡다가 점심 겸 저녁으로 한국에서 가져온 고추참치, 김에 밥을 먹었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또 시리얼을 와구 먹다가 한 박스를 하루 만에 끝내버렸다. 이럴 거면 그냥 과자를 살 것을 그랬나 봐. 시리얼은 끼니 대신 먹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과자 대체로 먹고 있잖아? 밥을 먹는데 집주인의 친구분이 와서 코스타리카 호박 요리를 먹어보겠느냐고 건네주셨다. 엄마가 한국 집에서 이런 걸 식탁 위에 올려줬을 때 먹을 리가 만무하지만 역시나 크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먹었다. 무슨 요리인지 여쭤봤더니 picadillo de ayote tierno라고 대충 호박을 잘라서 익혀 간을 한 것 같은데 비주얼에 비해 맛이 심심했다. 아마 여기 사람들은 밥에 간을 해서 먹기 때문인 것 같다. 덕분에 따뜻한 반찬 하나를 추가해서 또 한 끼를 먹었다.


저녁에는 대학원 동기 언니들이랑 연결해서 근황을 나누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그동안의 일을 모두 전하기 쉽지 않았지만 그냥 징징거릴 곳이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그 몇 주 사이 누구는 고생하던 프로젝트가 끝나기도 하고 또 누군 몽골로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들을 들으며 모두의 시간이 각자의 자리에서 잘 흐르고 있구나 싶었다. 그 사이에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난히 천둥이 쳤는데 아마 날씨 때문에 벌레들이 오늘 더 들어왔었나 보다. 개미들을 피해 이번 집으로 온 것인데 어째서인지 또 개미들이 생겨서 이번엔 무서운 것보다 귀찮은 마음으로 짐들을 다 꺼내 개미 퇴치를 위해 힘쓰다 잠들었다. 벌레들과 또 언니들과 함께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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