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 까기, 양파 까기, 토마토 자르기, 버섯 씻기, 면 삶기
2024.09.17. (화)
어제 집에 돌아가서 도넛에, 과자에, 바나나에, 람부탄까지 과하게 먹은 이유를 생각해 보니 수업을 듣고 약간 힘이 든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면 시간이 늦어져서 배가 고프고 또 먹고 나면 피곤~나른~해져서 누워서 핸드폰을 조금 하다 몽롱해지면서 잠깐 잠들었다 일어나서 다시 먹을 수 있는 추진력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도시락을 챙겨 왔다. 어제 귀갓길에 학생 식당에서 도시락 챙겨 와 전자레인지를 돌려서 먹는 친구들을 보았기 때문! 어제 과제가 얼마나 많았는지 오늘은 진도를 하나도 못 나가고 과제 검사만 하다 수업 시간이 다 지나갔다. 그중에 한국에 대해 발표하는 것이 있었는데 읽지 말고 외워서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오가며 중얼중얼거려 보았다. 오늘 진도를 나가지 못해 새롭게 받은 숙제: buscar una noticia de Latinoamérica, leerla y contarla 라틴아메리카 관련 기사를 읽고 이야기하기.. 선생님 정말 제가 스페인어로 기사를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하라면 해야지. 학생 식당에 앉아 챙겨 온 김치볶음밥을 먹고 (자리가 부족해서 앞에 학생 두 명이 앉았는데 뻘쭘하게 냠냠하다 너는 무슨 공부를 해?라고 하길래 나.. 스페인어.. 했더니 오 어디서 왔는데? 해서 한국에 왔다니까 교환학생 같은 거야? 음.. 나는 은행에서 일하는 중이야! 에서 마무리 되었다. 더 안 물어봐줘서 고마워.. 한국어로도 설명 잘 못하겠는걸! 나는 은행에서 일하는데 왜 여기서 스페인어 공부하고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걸까.) 도서관에 앉아 챗지피티에게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어느 신문을 읽니.. 물어보아 La nación이라는 곳을 찾았다. 기사 리스트를 주욱보다 독립기념일 행사 관련된 것으로 하나 골랐다. 분명 왜 이 기사를 골랐니? 하고 물어보실테니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라 골라봤어! 하고 답할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사 전문을 패드에 필사해서 챗gpt랑 함께 공부했더니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아직 과거 동사 변형은 배우지 않아서 잘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gpt가 동사 원형과 변화 규칙을 공부시켜 줬다. 역시 한국이든 이곳이든 집 밖에서 능률이 오른다. 오랜만에 미리 과제까지 마치고 마침 노트북 배터리도 부족하여 도서관을 나섰다. 그리고 괜히 한 번 또 집 앞 마트 구경을 가보았는데 평소와 다른 문으로 들어갔다가 빵집을 마주쳤다. 아니 그니까 내가 처음 여기 마트 왔을 때 도넛이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빵코너가 없어서 실망하고 어제 다른 마트로 옮겨서 도넛을 공수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본격적 빵집을 따로 달고 있으니 베이커리 코너가 없었던거지! 데려가 달라고 손드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어제 기억을 되살려 몇 명 사진만 찍어두고 다시 마트로 향했다. 첫날부터 생각했던 파스타를 만들어볼까 싶어 토마토와 아보카도, 버섯, 슬라이스 햄, 바나나를 사 왔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마늘을 까고, 양파를 까고, 토마토를 자르고, 버섯을 씻고, 파스타 면을 삶았다. 이탈리아에서 지내던 시절 거의 요리하지 않고도 꾸준히 맛있는 음식들로 끼니를 챙길 수 있었던 건 다 친구들 덕분이었는데 그중 냉장고에 있는 이런저런 재료들을 전부 넣고 했던 파스타가 유독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날부터 생각해 왔다. 파스타는 이것저것 많이 넣으면 맛있다! 부족하려나 싶어 면을 계속 넣다가(파스타 만들 때 국룰) 5인분 양을 만들어버렸다. 면이 너무 많아서 소스를 한 통을 다 넣었는데도 싱거워서 케첩을 추가하다가 실수로 엄청 많은 양의 케첩을 넣어버렸다. 그냥 먹어~4등분 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그중 하나를 저녁으로 먹었는데 뿌듯함의 맛인지 케첩의 맛인지 꽤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서도 또 나머지 람부탄을 전부 먹어버렸다.
밥을 먹기 위해 마늘을 까고, 화장실을 청소를 하고, 세탁기에 세제는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찾아보는 이 과정으로 떠나온 의미가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나이브한 걸까? 아마 그렇겠지. 내년 이맘때면 차가운 FA 시장에 내던져져 이직의 과정을 겪으며 마늘 까보는 게 뭐가 중요해.. 세제 얼마나 넣는지 모르고 살면 좀 어때.. 한국.. 회사.. 따뜻했다.. 생각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