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직 변호사가 찾아가는, 법제도의 '기원'과 '맥락'
도덕(윤리철학), 종교(율법), 법은 일맥이 상통합니다.
인류역사 이래, 긴 호흡으로 살아왔고, 우리 곁에서 늘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알고 있는 법제도 들은 사실 남이 입혀 준 '옷'과 같습니다. 스스로 재단하고 만든 적이 없는데, 불쑥 누군가 나타나 입혀주고 간 '옷'입니다.
누가, 어떻게, 무슨 이유로 만든 것인지, 그 과정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다가도, 답답함과 호기심이 쌓여가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법을 전공하고, 실무가로서 오랫동안 법을 다루어 오면서 그 갈증은 더 심해져만 갔습니다,
여기저기 물어도 보고, 찾아도 보고, 그렇게 알고 깨달은 것들.
기회가 되는대로, 하나씩 펼쳐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법을 안다는 것은 그것들의 단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효력과 권한을 기억하는 것이다."
- "scire leges non hoc est verba earum tenere, sed vim ac potestatem"
이 법언은 로마법대전 중, '학설휘찬'(Digesta)에서, 로마의 법학자 켈수스(Publius Juventius Celsus, 67 ~ 130)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2. 우리에겐, 너무도 아리송한 번역 한자어 들여다 보기
법언의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로마법대전을 살펴보겠습니다.
'학설휘찬'이란 어려운 한자어는 동로마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로마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들 중 하나를 말합니다.
로마법대전은, '학설휘찬'(Digesta), '칙법휘찬'(Codex) 그리고 '법학제요'(Institutiones)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말들은 일본이 메이지 시대에 서양의 법과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라틴어를 번역한 한자어들입니다.
'학설휘찬'을 의미하는 'Digesta'는 '정리된 것', '체계적으로 배열된 것'이라는 라틴어입니다. '학설(學說)'은 '학자들의 이론이나 견해'를, '휘찬(彙纂)'은 '모아서 편집함'을 의미합니다.
라틴어 'Institutiones'는 '기초', '입문', '교육'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를 '법학제요(法學提要)'로 번역했습니다. 지금도 곳곳에 '실무제요'라는 책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참 오래된 기원을 가진 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Codex'는 라틴어로 '나무판', '책', '문서철'이라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밀랍을 바른 나무판자에 글을 새겨 문서를 보관했고, 이러한 형태의 문서철을 'codex'라고 불렀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Codex'는 일본에서 '칙법휘찬(勅法彙纂)'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칙법(勅法)'은 '황제의 명령으로 만든 법'을 의미하고, '휘찬(彙纂)'은 앞서 설명했듯이 '모아서 편집함'을 의미합니다.
결국, 'Codex'는 로마 황제들이 발령한 칙령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법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재 주로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영어단어 'Code'는 바로 이러한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탠퍼드대학 로렌스 레시히(Lawrence Lessig) 교수는, "코드가 법이다."(Code is Law)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바로 컴퓨터를 제어하는 '코드'가 현실 세계의 '법'과 유사한 규제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어려운 한자어 번역의 기원은 이렇습니다.
한자어를 설명하다 보니, 새삼 대학시절 한자를 쓰지 않으면 교수님들이 시험채점도 마다하셨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3. 로마법대전 편찬의 '속사정'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로마법전 편찬사업(529 ~ 534)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정치적 목표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시대적 배경을 보면, 유스티니아누스 이전의 로마법은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된 법령들, 황제들의 칙법, 그리고 수많은 법학자들의 해석이 체계 없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혼란 상황은 재판의 지연과 불확실성으로 이어져, 체계적인 법전의 편찬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또한, 서로마제국 멸망 후, 동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건하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니, 로마법대전 편찬사업은 그에게는 중요한 '로마 재건' 프로젝트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이루어진 대규모 법전 편찬사업은 인류역사에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영향을 남겼습니다.
후대의 유럽 법학은 이 법전들을 기초로 발전했고, 오늘날 대륙법계 법체계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민법전도 상당 부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다시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 민법에도 계수되었습니다.
이처럼, 로마법편찬사업은 로마법의 정수를 체계화하고, 이를 후세에 전달하는 거대한 문화적 프로젝트였습니다.
4. 그래서 1. 항은 무슨 뜻이길래?
사족이 길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래된 이 법언의 맥락은 이렇습니다.
켈수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위와 같이 로마법이 매우 복잡해진 시기였습니다. 수많은 법령과 법학자들의 해석이 축적되면서, 일부 법률가들은 법조문을 단순히 암기하는데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켈수스는 이러한 현상을 비판하면서 이 말을 남겼던 것입니다.
'법의 효력'(vim)이란 그 법이 실제 사회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매매계약에 관한 법조문을 암기하는 것보다, 그 계약이 당사자들의 권리의무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법의 권한'(potestatem)은 그 법이 가진 규범력의 범위와 한계를 의미합니다. 법이 어떤 상황에서 적용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적용되지 않는지, 다른 법들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법언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법치주의'가 일반화된 사회 공동체에서, 같은 법문을 놓고도 각자 서로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다시 이를 통해 갈등이 증폭되는 악순환은 참으로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법문에 써진 글들의 정신, 맥락, 사회적 기능과 목적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 법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오래된 법의 '숨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오래된 것은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Alles, was lang ist, ist schwer zu sehn, zu übersehn)고 설파한바 있습니다.
법문 또한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오랜 역사를 갖는 것들의 단어는 쉽게 그 의미를 단정할 것이 아니라, 요모조모 살펴보며, 진정한 의미를 찾아 깊게 들어가 (Deep dive) 볼 것을 소망합니다.
법의 단어들을 쉽게, 정의내림을 경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