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1권의 가격 = 400만원?

- 판.작.썰 : - 바츠 대 앤스로픽 저작권 소송 합의 -

by 이정봉 변호사

이번에는, 미국의 따끈따끈한 사례를 살펴 봅니다.


프롤로그: '빠르게 움직이고 기존 질서를 파괴하던' 시대의 종언


실리콘밸리에는 오랫동안 신성시되던 주문이 하나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고 기존 질서를 파괴하라(move fast and break things)’.


기술의 진보 앞에서는 낡은 규칙 따위는 사소한 장애물에 불과하다는 오만과도 같은 믿음이었다.


생성형 AI라는 미지의 대륙을 발견한 개척자들에게 이 주문은 복음과도 같았다. 인터넷이라는 무한한 황야에 흩어진 데이터를 마차에 싣고, 밤낮없이 용광로에 쏟아부었다. 그렇게 그들은 ‘거대 언어 모델(LLM)’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을 빚어냈다.


하지만 그들이 싣고 온 마차에는 주인이 있는 과실이 가득했다. 수십만 작가들의 피와 땀으로 빚어낸 이야기, 즉, 저작권이라는 족쇄가 달린 책들이었다.


그들은 ‘그림자 도서관(shadow libraries)’이라 불리는 어둠의 경로에서 7백만 권이 넘는 책을 훔쳐왔다. 결국, 작가들은 도둑맞은 자신들의 유산을 되찾기 위해 법정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2025년 가을, 한 장의 문서가 실리콘밸리에 도착했다.


AI 기업 ‘앤스로픽’이 작가와 출판사 집단에게 15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조 원에 달하는 돈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합의문이었다. 미국 저작권 소송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이 천문학적인 합의는, 단순히 한 기업의 법적 분쟁이 마무리되었음을 알리는 부고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선언문이자, AI라는 새로운 제국의 질서가 어떻게 세워질 것인지를 예고하는 계시록이었다.


제1장: 현자의 칼, 알섭 판사의 이중 판결


이 거대한 합의의 막후에는 윌리엄 알섭 연방지방법원 판사라는 한 명의 현자가 있었다.


그는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 법정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칼을 휘둘렀다. 그의 칼날은 AI 산업계와 저작권자 모두에게 각각 승리와 패배를 안겨주었다.


첫 번째 칼날은 AI의 손을 들어주었다. 알섭 판사는 저작물을 이용해 AI를 ‘학습’시키는 행위 자체는 ‘공정 이용(fair use)’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그는 AI를 “무언가 다른 것을 창조하기 위해” 기존의 작품을 탐독하는 “작가를 꿈꾸는 독자”에 비유했다. AI가 단순히 책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경이롭게 변형적”이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실리콘밸리는 환호했다. 자신들의 행위가 법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칼날은 정확히 그들의 심장을 겨누었다.


알섭 판사는 ‘공정 이용(fair use)’이라는 방패는 오직 합법적으로 얻은 무기일 때만 유효하다고 선언했다. 그는 앤스로픽이 불법 복제 사이트에서 7백만 권이 넘는 책을 훔쳐와 ‘중앙 라이브러리’를 구축한 행위 자체를 “본질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침해적인” 범죄로 규정했다. 아무리 그럴싸한 요리를 만들었다 한들, 그 재료를 훔쳐온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 판결은 AI와 저작권의 싸움이 벌어지던 전장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핵심 질문은 ‘AI의 학습은 정당한가’라는 철학적 논쟁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신들, 그 데이터 어디서 훔쳐왔는가’라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질문으로 바뀐 것이다.


제2장: 750억 달러의 ‘사형 선고’


알섭 판사의 판결에 이어, 2025년 7월 내려진 ‘집단소송(class action) 인증’ 결정은 대못을 박는 망치 소리와도 같았다. 이 결정으로 소송을 제기한 단 3명의 작가가 불법으로 복제된 수백만 권의 책을 쓴 모든 작가들을 대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앤스로픽이 마주한 현실은 단순한 소송이 아니었다. 그것은 재정적 ‘사형 선고’였다. 고의적 저작권 침해에 대한 법정 손해배상액은 저작물 한 건당 최대 15만 달러. 만약 앤스로픽이 훔쳐온 책 수백만 권에 이 금액이 곱해진다면, 그들이 물어야 할 이론적 최대 배상액은 750억 달러, 우리 돈 100조 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액수에 달하게 된다. 앤스로픽 스스로가 이 상황을 회사의 존립을 위협하는 ‘죽음의 종소리(death knell)’와 같다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결국 앤스로픽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750억 달러라는 파멸적인 미래와 15억 달러라는 고통스러운 현실 사이에서, 그들은 후자를 택했다. 이는 유죄를 인정하는 자백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리스크 앞에서 회사의 생존을 위해 내린 냉철하고 합리적인 전략적 판단이었다.


제3장: 가격표가 붙은 데이터, 새로운 질서의 서막


15억 달러라는 합의금은 앤스로픽이 과거에 공짜로 훔쳤던 데이터에 대해 막대한 프리미엄을 붙여 소급 적용된 ‘강제 라이선스 비용’이나 다름없었다. 저작물 한 권당 약 3,000달러. 한화로 약 400만원이다.


이 숫자는 시장에 던져진 하나의 기준점이 되었다. AI 학습 데이터는 더 이상 공짜 자원이 아니며, 여기에는 명백한 ‘가격표’가 붙는다는 사실을 시장 참여자 모두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AI 산업의 데이터 확보 방식은 거대한 전환을 맞이한다. OpenAI는 AP 통신이나 악셀 슈프링어 같은 미디어 그룹과, 구글은 AP 통신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기 시작했다. 이미지 제공업체인 셔터스톡은 메타, 아마존, 애플 같은 빅테크에 데이터를 라이선싱하며 2023년에만 1억 4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무단 스크래핑의 시대가 가고, 공식적인 라이선싱 경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새로운 질서는 시장의 지형마저 바꾸고 있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거대 기업들은 자사의 AI 서비스를 사용하는 기업 고객들에게 “만약 소송을 당하면 우리가 전부 책임져 주겠다”는 ‘지적 재산권 면책(IP indemnification)’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막대한 자본과 법무 역량이 없는 스타트업들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규정 준수 해자(compliance moat)’를 구축하는 것과 같다. 이제 AI 시장의 경쟁력은 기술력뿐만 아니라, 얼마나 깨끗한 데이터를 확보하고 법적 리스크를 막아줄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에필로그: 끝나지 않은 전쟁


앤스로픽의 합의는 데이터 ‘입력(input)’ 단계의 원죄를 씻어냈을 뿐, AI와 저작권의 전쟁을 종식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선은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고 있다.


AI가 뱉어내는 ‘출력물(output)’이 원본을 거의 그대로 복제하는 문제(뉴욕타임스 대 OpenAI 소송), 특정 작가나 화가의 고유한 ‘스타일’을 모방하는 문제(앤더슨 대 스태빌리티 AI 소송)는 여전히 법정에서 치열하게 다투어지고 있는 미지의 영역이다.


앤스로픽의 15억 달러는 끝이 아닌 시작이다. 기술의 진보와 창작의 가치가 서로를 존중하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 나가는 긴 여정, 그 서막을 알리는 값비싼 교훈이었던 셈이다. 황야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 우리는 법과 계약이 지배하는 새로운 제국의 건설을 목도하고 있다. 그 제국의 미래가 유토피아가 될지, 디스토피아가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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