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힘듦 인가보다. 그 사이에 우리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기쁘거나 슬픈 일을 겪으며 지낸다. 힘들기만 한 인생은 없다. 즐겁고 쉽기만 한 인생은 없듯이.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을 부여받았지만 사용은 다르다. 하나님께 받은 재능을 우리는 얼마나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동생네는 우크라이나에 산다. 백인들 사이에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어느덧 이십여 년이 넘어 가는데도 아직도 그렇게 긴장의 연속으로 사는 이유다. 내 동생이라 대단한 게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일들을 맡기셨고 그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외국인으로 모진 박해를 받고 동유럽을 갔을 때 이해하지 못했지만, 뜻이 있으리라 여겼다. 이십여 년이 지나서 이제 그의 뜻이 뭔지 알아간다. 한국인으로 국립대 교수로 세우고 선교로, 말씀으로 이루어 가심을 본다. 코로나로 교회의 모임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대학이나 세종 학당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성업 중이다. 이것만 봐도 여러 지혜로 이끌어 가심을 본다.
우리는 살면서 작은 것들로 충성할 때 그것으로 많은 것들을 이끌어 내심을 본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이 있다. 나는 동생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본다. 인간이 이룰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같이 하심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 있다. 개인적인 삶은 늘 힘들다. 나뿐 아니라 내 가족과 동생의 시간도 쉽지 않고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일도 있다. 그것 모두 우리의 몫이다. 그 가운데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 어떻게 그의 일을 이루고 이끄시는지. 작은 일들로 결국엔 원하는 사업을, 하나님의 일을 이루심을.
이유 없는 일은 없는 것 같다. 내게 주어지지 않은 일들에 대한 원망과 힘듦은 어느새 다 이유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그의 뜻이 아니니까. 그럴 이유가 있지 않았나 하고. 그러나 인생의 의미는 누군들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의 뜻이나 길을 알지 못하기에 늘 애쓰고 발버둥 칠 뿐이다. 그 사이 실망과 원망, 기쁨을 느끼는 거겠지. 인생은 늘 알지 못하는 새 흘러간다. 어디로든 우리가 향하는 곳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향하는 접점이 될 것이다. 그러려면 바른 방향으로, 아니 옳은 방향을 향해야 한다. 그곳이 어느 곳이든 좋은 생각, 바른 지향점, 올바름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내게 주어진 길이 어디든 나아갈 것이다. 언제나 지금처럼.
자기에게 부어지는 채움이 늘 넘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남에게 나눠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에. 나는 나를 몰랐다. 이제야 알아가는 중이며 애쓰고 있다. 내게 부어진 감사함을 느끼지도 못하고 늘 불평과 불만으로 뾰족함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동생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나는 그런 불만에 자유롭지 못하다. 드러내 놓진 않았지만 이미 내 마음과 생각은 나를 지배하고 있다. 내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다. 감사함도, 충분한 만족감도 없이 살았는데 이제야 이기적임을 느낀다. 이미 많은 것들로 채움 받았으니까.
나의 자식에 대한 믿음은 늘 보답받았다. 아이들은 바람보다 잘 자랐고, 많은 것들로 돌려받았다. 그것만으로도 다 된 것이다. 나머지는 내 삶에 있어서 부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으니까. 내 은사님은 인생 최대의 응답은 자식이라 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은퇴를 앞둔 선생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마음에 새겼다. 살면서 선생님의 말이 생각난다. 나도 내 인생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도 과연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부끄럽지 않은 그런 부모가 될 것인가?
작년 성탄절 무렵 하늘로 간 친구 생각이 난다. 요즘 그녀 생각이 많아진다. 내가 막을 수 없었던 친구의 죽음. 미처 알아챌 수 없던 그 시간들을. 남겨진 가족은 어떻게 지내는지 벌써 1년여의 시간이 되었다. 걱정이기도 하다. 들려오는 소식은 아직도 힘들어하고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란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얼마나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는데. 마지막으로 남겨진 그녀의 모습은 잊지 못할 트라우마로 남았을 텐데. 나의 마지막은 그런 아픔과 이별할 수 있으면 좋겠다. 좋게 기억되고 싶다. 가족과 남겨진 이들에게. 나는 잘 살았다 생각하며 남겨진 이들에게 박수받으며 떠나고 싶다. 한 장 편지로 내 자식들로 와줘서 감사했노라 쓰고 싶다. 아름답게 그린 마무리가 될 것이다.
나의 글쓰기는 나를 위한 치료요 감사함이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내 시간과 나를 만나게 해 준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대한 정리와 미래로 나갈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시간이며 주어진 감사함이다. 나를 이해하고 내 글을 읽어주는 이들과 연결해 주고 나도 그들을 알아간다. 부족함 많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있다. 이런 시간 속에서 나는 치유되고 있다. 내 마음과 정신을 온전하게 맡긴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 이 또한 감사하다. 언제 내가 이런 시간들을 가져볼 것인가?
삶은 살아볼 만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 시간들은 모두 예측이 가능하지 않기에 살아볼 만한 것이리라. 모든 것을 알고 예측한다면 얼마나 심심하겠는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처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처럼 날마다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힘듦이 있을지라도 그 사이 기쁨과 환희도 자리를 차지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많은 것들로 채워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늘 나를 들뜨게 한다. 살아볼 만하게 여기는 이유다. 오늘도 나는 열심히 계획하는 일들 속에 나를 다독이며 감사함으로 한 발자국씩 나아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