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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림 Jul 16. 2023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냉장고가 탈이 났다. 한여름 복중에 고장이라니. 냉동실 문짝이 안 닫혀서 얼음이 녹은 줄 알았다. 그러다 조용한 집에 갑자기 소음이 나 둘러보니 냉장고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냉장고가 문제를 일으킬 줄 몰랐다. '왜 이런 소리가 나지' 하는 생각뿐 더워서 그런가 보다 했으니까. 그러다 냉동실 냉기가 사라지더니 점점 얼음이 녹는 게 확인될 정도였다. 바로 냉장실도 냉기가 없어졌다.


밤늦게 가전사의 앱으로 AS를 신청했다. 당연히 내일 올 줄 알았지만 가장 빠른 예약 일이 1주일 뒤였다. 우선 예약을 하고 아침에 전화를 했다. 혹시 취소한 건이 있나 날짜를 당길 수 있는지 문의하니 센터에 전화를 해선 토요일로 잡아주었다. 그래도 며칠이나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라 급한 대로 김치냉장고의 여유분을 확보해 당장 넣어야 할 내용물들을 옮겨 놓았다. 그래도 냉동실의 제품을 모두 넣을 순 없어 최근에 입고된 것 순으로 옮겨 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내 냉장고의 상태를. 혹시나 새로 교환하는 게 나을지 오는 길에 대리점에 들렀다. 매장엔 냉장고가 종류별로 원하는 대로 다 있었지만 당장은 배달이 안된다고 했다. 주말 지나 월요일이나 되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카탈로그 하나 받아 들고 구경했던 모델을 한 개 찜 해놓고 돌아왔다.


주말 아침에 주방을 치우고 냉장고의 물건들을 다 꺼냈다. 냉동실의 식재료는 모두 녹아 상한 것도 있었고 냄새가 나서 물이 줄줄 흘렀다. 그리고 냉장실의 재료 또한 당장 사용할 것만 김치냉장고로 옮긴 상태라 장아찌류나 상온에 두어도 괜찮은 것을 제외하고 모두 버려야 했다. 음식물 쓰레기 봉지 큰 거 3장을 사서 버리려고 보니 멀쩡한 식재료들이 다 쓰레기가 되어있었다.


방바닥에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수많은 음식과 재료 모두 쓰레기였다. 그걸 보는 순간 꼭 내 마음 같았다. 정리하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는 마음 말이다. 오래되었지만 선물로 들어온 곶감이나 비싼 게살세트, 커다란 굴비 등 먹지 못한 식재료가 고이 쌓여 버려 달라 악취를 피우고 있었다. 정리 못하는 마음이 욕심 같고 꾸역꾸역 넣었던 음식과 식재료가 감정의 쓰레기처럼 고이 남아있는 꼴이었다.


십 리터짜리 쓰레기봉투에 담아 꽉꽉 채웠다. 평소 같으면 떡을 할 때 쓰는 손 많이 가는 고물이나 각종 쌀과 찹쌀가루, 직접 만든 피자용 소스, 제과용 라즈베리 퓌레 등이 아깝게 생각될 텐데 한 번도 먹지 못하고 음식용 쓰레기봉투에 담기는 신세를 보니 내가 잘못 살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다루고 가르치는 입장에선 아끼고 허투루 버리는 게 없어야 하는데 나는 얼마나 수많은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나 많은 재료를 버려야 하는 걸까 자책이 들었다.


불가에선 발우 공양을 한다. 승려들이 자기가 먹을 만큼 음식을 덜어 먹고선 자신의 그릇을 김치로 씻어 마시고 나머진 청수물이라 모은 물조차 깨끗하다 한다. 악귀가 먹는 음식조차 걸리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난 음식과 식재료를 한꺼번에 많이 버렸다. 내 죄가 얼마나 많은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다. 불자도 아니나 수많은 식재료를 보면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 그간 내가 덜어내지 못해 아까워 쟁여두었던 식품을 버리면서 드는 생각은 마음의 찌꺼기처럼 쌓여 있던 게 수면 위로 드러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혹시나 수리가 되면 당분간 사용하다 새 걸로 바꿀 생각이었으나 AS 기사가 보더니 컴프레서가 나갔다면서 수리비가 많이 드니 교환하는 게 더 나을 거라 했다.


거실 가득 늘어뜨려 두었던 식료품과 냉장고에서 나와 눈물 흘리는 수많은 재료들을 놓고 보니 꼭 지금의 나 같았다. 감정의 골을 차곡차곡 쌓아두기만 하고 터뜨릴 줄도 꺼내 지도 못하는 나를 보는 듯해 마음이 언짢았다. 어떻게 야 하는지 앞이 보이지 않았고 이걸 어떻게 치우나 하는 생각뿐 쓰레기봉투가 차는 걸보며 나도 이처럼 시원하게 버려졌으면 하는 맘이었다.


아무리 고급 재료라도 생선의 상한 냄새와 함께 섞이다 보니 의미 없었다. 그저 그 순간만큼은 아까운 것도 다시 살리고 싶은 것도 없었으니 내가 이렇게 둔감했나 싶다. 급하게 먹을 수 있는 돈가스나 냉동 만두는 오븐에 굽고 쪄서 한 끼 먹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매일 같은 반찬을 끼니로 먹는 것조차 지겨워하는데 어찌 같은 음식을 매끼 먹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다양한 품목으로 직업 특성상 쟁여두는 것이 분명 많을 수밖에 없다. 맛있어서 넣어두었던 청국장과 과하게 많았던 낙지, 오징어, 고등어 등이 아까웠다.


돈으로 치면 이게 얼마인가 하지만 이걸 버리는 데도 돈이 드는 기막힌 상황이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쌓일 때는 나도 모르게 놓아두었다가 정리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땐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버릴 수 있다. 어려서 받은 결핍과 부족한 사랑은 평생을 갈구하며 채우고 싶어 한다고 한다. 누구든 자기의 감정과 갖지 못한 욕망 사이 그 어디쯤 존재할 것이다. 냉장고는 그런 내 욕망의 덩어리였나 보다.


냉장고에서 나온 악취와 쓰레기 덕에 난 훌훌 지난 음식을 버리며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을 얻게 되었다. 생각의 전환은 어쩌면 아주 당연한 결과다. 덜어내야 다시 채워진다는 진리를 잊고 사니 가끔은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절로 주어지기도 한다. 이런 강제적인 시간을 통해 어떻게든 삶은 나아가고 있다. 덕분에 먹지 않던 재료들을 한꺼번에 버리고 새로운 냉장고를 얻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게 내가 지불해야 할 비용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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