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가 산책을 가잔다. 근처 안산에 같이 가기로 했다 못 가기를 여러 번 오늘은 따라나서겠다 했다. 교회 다녀와 환한 대낮 기온도 높고 더울 거 같아 미루려 했지만 햇살이 잦아드는 저녁이 되면 마음이 변할 거 같아 집을 나섰다. 마실 생수 하나를 냉장고에서 꺼내 놓고선 식탁 위 물을 한 잔 마시고 나왔다. 오다 생각해 보니 손이 너무 심심해 생수를 놓고 온 걸 알았다. 어쩌지 싶지만 멀리 조카가 기다리고 있는 게 보여 그냥 같이 길을 나섰다.
한낮의 온도가 30도를 웃도는 날씨다. 거리엔 온통 반팔에 반바지 차림의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5월에야 느낄 수 있는 더위인 데 갑자기 벚꽃이 지자마자 여름으로 달려가는 듯하다. 거리엔 하얀 라일락이 피어 달콤한 향을 내뿜는다. 천천히 걸으며 얇고 가벼운 옷차림을 한 사람들 틈에 우리는 햇빛을 피해 모자를 쓰고 있다. 지나온 얘기, 수업이며 동아리 활동과 시험 준비 등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운다. 환한 햇빛만 우리를 비추는 게 아니라 같이 걷는 우리에게 살가운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조카는 아직 만 19세가 지나지 않아 이번 선거에 투표를 하지 못했다. 대학생이 된 지 벌써 2년째니 어엿한 프레시 맨도 아니라 작년과 다른 느낌이라고 한다. 작년엔 도망가고만 싶었다며 참고 견디니까 이제는 좀 나아졌다면서 웃는다. 뭐든 새로운 것은 쉽지 않다. 한국에서 자라고 수업한 친구들 또한 쉽지 않은 게 전공 공부 아니던가. 외국, 더구나 우크라이나서 자라고 공부한 학생이 한국의 원어민 수업이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이런저런 수업을 듣고 팀프로젝트나 리포트 만드는 게 어찌 쉬웠을까. 이젠 미국인 친구도 사귀면서 같이 포토 사진도 찍고 서로 소통도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서 영어는 필수로 배우는 언어가 아니다. 별도로 배운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으니 다행 아닌가.
우크라이나어, 영어, 한국어, 러시아어까지 할 수 있으니 한국어 글쓰기가 능숙지 않은 것은 어쩌면 애교 수준 일 것이다. 도망가고만 싶었을 때 엄마, 아빠가 먼 타국에서 참고 견디는 것을 본 게 도움이 되었다면서 자기도 그런 것을 보고 자라 견딜 수 있던 거 같다며 웃는다. 순간 마음이 짠해 온다. 멀리 타국서 선교라는 산을 넘고 있는 동생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카는 한국 국적이나 먼 외국 같은 이곳에 홀로 떨어져 생활하고 있으니 공부뿐 아니라 먹고 입고 생활하는 모든 것이 쉽지 않을 텐데 밝은 얼굴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려왔다. 길게 보면 살면서 지금의 경험이 분명 도움 될 것이라 말해주었다.
안산 둘레길을 걸으며 울긋불긋 벚꽃이며 라일락, 철쭉, 진달래, 개나리 등 꽃잎이 흩날리며 떨어져 있는 흔적을 보는 것만 해도 융단이 깔린 듯 여러 빛이 어울려 날린다. 이런 계절 밝은 봄을 맞이하는 것조차 멀리 우크라이나는 어떨까 떠올려 본다. 아직도 하루에도 공습이 스무 번이 넘게 울려 수업하다 사이렌이 울리면 지하 벙커로 달려가는 일이 잦다고 했다. 마침 마트나 볼일을 보러 갔을 때 경보가 울리면 계산을 끝냈을 땐 들고나갈 수 있지만 계산 중이면 그냥 놓고서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고 했다. 얼마 전 톡으로 학생들이 수업 중 공습 때문에 지하 벙커에 모여 공부하는 장면을 보내온 적이 있다. 전쟁은 종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게 하지만 역시나 일상은 살아야 하고 잘 돌아가야 하니 불편을 감수할 뿐이란다.
멀리서 그런 소식을 듣고 있으면 기분이 어떨까 싶다. 얼마나 그립고 가족의 품이 생각날까. 집에 돌아가고 싶고 빨리 전쟁으로부터 자유롭기 원하고 기도할까 하는 마음에 순간 울컥한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꽃잎이 흩날리는 것을 보면서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도 이제는 기온이 많이 올라 봄이 왔다 한다. 전쟁 중이라 해도 사람은 살아야 하고 일상은 돌아간다. 식료품비가 몇 배나 올라 구하기 어려워도 먹고살만하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곳의 삶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해하고 알 수 있을까. 엄마 아빠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 조카는 자기에게도 그런 게 다 입력돼 있다는 말로 웃는다. 어쩌다가 애어른이 되었나 싶어 가끔 아직 애기라 생각했던 것들이 다 사라지고 내가 잘못 이해했구나 싶다. 우리가 떨어져 살았던 세월을 어떻게 다 메꿔서 채울 수 있겠는가. 생각이나 생활, 가치관 등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나 보다.
오랜만에 둘레길을 걸었는데 한낮의 온도가 높아서였는지 힘들었다. 나도 좀 지치고 빨리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음엔 좀 더 간소하게 봉수대로 향하는 짧은 코스를 돌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사람의 생이란 게 언제 어디서 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자기의 위치가 바뀌기도 하고 생각이 변하듯 내 앞일을 예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 시공간에 같이 살지 않으니 이해의 폭이 좁을 수밖에. 조카와 짧지 않은 산행으로 소통하면서 매주 만나 같이 밥 먹고 듣는 이야기가 아닌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자기의 속을 터놓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나도 폭넓은 아량으로 품어주어야지 싶다.
내 질그릇 같은 무딘 마음에도 어서 전쟁의 기운이 가시길 간절한 마음이지만 어째서 여기저기 들려오는 소리는 새로운 전쟁의 소식만 있을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몇 해가 흘렀는데도 아직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고 가자 지구와 더불어 이란이 이스라엘을 침공했다는 뉴스를 듣는다. 지구촌 여기저기서 울리는 전쟁의 포화 속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불면의 밤을 이어가야 하는 것일까.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주는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한다. 아무 일 없이 눈뜨고 하루를 건강하게 보낼 수만 있다면 지구에서 얼마 없는 평화를 맛보는 것이니 지금을 감사해야 할 때다. 평화롭게 잠들고 먹고 마실 수 있는 현실이 눈물 나게 고마우니 먼 곳의 그들에게도 어서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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