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 사람이 없었다. 엄마는 직장에 다닐 때였고 한옥이었던 우리 집은 세 들어 사는 여러 식구들로 북적이던 집이었다. 세 든 가족도 엄마가 집에서 맞아 주는데 나를 맞이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어린 나이에도 지극히 소외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동생과 저녁을 챙겨 먹기도 했지만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해가 뉘엿 넘어가도록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면 식구가 모여서 보글거리는 갓 한 음식을 해서 같이 둘러앉아 먹는 저녁밥이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식구라도 다 같이 모여 나누는 저녁을 좋아했다. 자라면서 혼자서 끼니를 해결하고 혼자 먹는 밥은 사실 기억에 없다. 늘 동생이나 누군가와 같이 먹는 밥이 있었기에.
커가면서 가족과 같이하는 시간은 줄어든다. 각자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새로 꾸린 가정에서 맞는 끼니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어떤 밥과 마주했나 떠올려 본다. 자녀를 낳고 성장해 가는 동안 뒤처지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밥상을 차려냈다. 요리를 배우고 새로운 음식을 시도하며 배운 것을 연습하고 그렇게 나의 상차림은 이어졌다. 가족의 응원과 감탄, 엄지 척이 나를 살리고 키워준 원동력이었다. 베이킹을 배우며 밤을 새워가며 만드는 빵과 쿠키, 케이크가 있었다. 무언가를 배울 때면 푹 빠져서 헤어 나올 줄 몰랐으니까. 늘 시작을 하면 수년을 이어갔고 손끝이 매섭게 하나씩 실력이 늘었다. 누군가의 지지가 없었으면 이어가지 못했으리라. 늘 나를 향하는 칭찬과 함박웃음이 나를 키워준 셈이었다.
힘든 줄도 모르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에 빠져 살았다. 지금 베이킹 강사로 요리로 살아간다. 배웠던 것들은 지금도 손끝이 기억하고 몸이 반응한다. 종이접기, 뜨개질, 테디베어, 홈패션, 꽃꽂이, 전통 떡 등 수많은 것들과 함께 했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몰두했던 데는 작은 외로움일 수 있다. 내 마음의 허전함과 뒤처짐에 대한 반박이었으니까. 자녀들이 커가면서 느끼는 소외감은 내면 깊이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내게로 향하는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내 허전함을 메우려 그렇게 애썼나 보다.
매일 집에 들어서며 느끼는 혼자라는 외로움은 나를 괴롭혔다. 아이들이 학교로 남편은 직장으로 나가면 외출할 곳을 찾았다. 누군가 외출복이 없어서 부끄럽다는 말을 했다. 때론 잘 차려입고 나왔으나 갈 데가 없더라는 말까지. 나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잘 차려입을 외출복도 없었고 딱히 갈 데도 없었기에 너무 많이 공감되었다고 할까. 갈 데가 없다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혼자 해결하는 끼니였다. 같이 먹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혼자인 걸 뼛속까지 느끼게 했다.
남을 위한 상을 차리는 사람들은 정작 자기를 위한 밥상 차리는데 익숙지 않다고 한다. 내가 그랬다. 그때부터 나를 위한 끼니를 차렸다. 아침저녁처럼 매번 새로운 찬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초라하거나 없어 보이는 밥상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나를 위한 시간도 내어줄 줄 아는 나를 발견했다.
수업을 하고 돌아오는 시간은 피곤함과 녹초로 인해 전처럼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늘 가족은 한결같이 나를 응원해 주었고 내 편이 돼 주었다. 보답으로 난 식구들이 원하는 것들을 만들어 주고 음식을 차려주는 그런 삶을 살았다. 지금에야 돌아보니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으로 볶거나 무쳤을 반찬이 오롯이 나를 위해서만은 준비하지 않게 된다. 내 게으름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하거니와 전과 같은 부지런함이 덜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마음에 꼭 맞는 끼니나 특별한 날 한 상 차려내던 내 밥은 여간해선 보기 힘들다. 매일같이 나와 마주 보며 시간 보내고 끼니를 먹어 줄 가족의 온기가 그립다. 같이 숟가락 들고 따스한 김 나는 밥을 떠먹어 줄 식구가 없다는 것은 앞으로 남은 오십여 년이 연상돼 슬프기도 하다.
누군가 직장에서 기껏해야 십분 정도에 해치워야 했던 식사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었다 한다. 후딱 먹어치우고 소비하고 음미하지 않은 밥상이 싫었다고, 그래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상을 차리는 지금이 좋고 혼자 먹는 밥상이 만족스럽다고 한다. 하나 난 아니다. 남을 위한 밥상을 이십육 년간이나 차리고 그들에 의해 살고 치유되었다. 나를 위한 게 아닌 줄로만 알았던 시간은 결국 자라고 만들어져 내가 성장하는 기간이었다. 남을 위했던 일들이 종국엔 내가 지내온 날들이었으니까. 난 그걸 몰랐으며 깨닫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각자 아이들도 자기의 상을 차린다. 때로는 회사에서, 집에서, 학교에서 자신만의 식사를 만들고 차리며 사진을 보내온다. 결론은 그들이 먹었던 그 어딘가엔 나와 같이 했던 기억이 들어있다. 그들만의 시간이 아닌 나랑 같이 숨 쉬고 느끼며 먹어왔던 추억이 있다. 그들도 그럴 것이다. 혼자가 아닌 가족의 시간이었다고.
오늘도 끼니를 해결하려 상을 차린다. 나를 위하던 가족을 위하던 누군가를 위한 밥을 차리고 고민한다. 살아가는 동안 지난 시간처럼 풍성하고 따뜻한 온기 넘치는 시기는 적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살아있고 또 다른 식사를 차리고 해결하며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질 것이다. 이번에야 말로 정말 나를 위한 밥상을 제대로 한번 차려내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