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둘, 책 한 권 들고 훌쩍 떠나다.

기억나는 이십 대의 여행기

by 최림


20대는 무슨 치기 어린 맘이었는지 두려움이 없었다.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라도 이루어 낼 것 같은 생각으로 가득 찼으니까. 한창 여행 자유화와 대학생 해외여행 붐이 일 때다. 우리는 직장인이라 돈보다 시간 여유가 없었다. 대기업은 여름휴가를 연중 원하는 때에 사용할 수 있기에 회사 동료이자 후배였던 유주와는 그렇게 마음을 맞추어 여름휴가와 연휴를 맞물려 길게 휴가를 내었다. 급작스럽게 떠날 계획을 세우느라 티켓팅을 못했는데 부서 동료가 칼(대한항공)에 친구가 있어 예약을 도와주었다. 준비는 되었다. 우리는 노란색 여행서 한 권만 들고 훌쩍 비행기에 올랐다. 밤 비행기로 방콕행 비행기가 내가 처음 타본 해외여행 기였다. 6시간 정도 비행에 시차 2시간을 더해 8시간이란 시간이 걸렸다. 요즘 같은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공항에서 바로 호텔 예약하고 택시를 타고 갔다. 짐 풀 생각도 안 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부터 책 하나 끼고 호텔서 주는 아메리칸 스타일 아침을 먹고 여기저기 누빌 계획을 세웠다. 미리 가보기로 한 장소만 골라서 방콕의 멋진 와불이 있는 사원과 궁전, 멀리 외곽의 한적한 피라미드를 닮은 사원까지 일정을 수행했다. 더운 지방이라 움직일 때마다 3발 달린 툭툭이라는 택시를 타고 이동을 했다. 지금처럼 에어컨이 빵빵하면 좋겠지만 창문을 열어놓고 더운 바람을 맞으며 먼지 날리는 길을 달려가야 했다. 그래도 뭐가 좋은지 우리는 연신 들떠 있었다. 처음 여행지기도 했거니와 스스로 일정을 짜는 자유여행이기에 하고 싶은 것을 모두 조율할 수 있었다. 수상보트를 타고 아침 시장을 보고, 방콕 동물원도 가서 커다란 뱀을 목에 두르기도 했다. 여자 둘이 무슨 기운으로 그렇게 쉬지 않고 돌아다녔는지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볼 게 얼마나 많은데 해가 지고 날이 저물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방콕의 아침 수상시장


이틀 정도 방콕을 보고 나니 색다른 곳을 보고 싶어 밤기차를 타고 치앙마이로 떠났다. 북부 산악지대라 덥지 않고 서늘하며 여러 부족들이 생활하는 도시다. 우리는 무척 궁금했다. 진정한 태국을 맛볼 수 있는 기회라 여겼기 때문이다. 도착을 하니 기차역에서부터 가이드 자격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한 젊은이와 계약을 하고 코끼리 투어와 산악 트래킹을 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코끼리 등에 올라타서 등산을 했다. 움직이는 것도 신기하고 보이는 풍광이 색달라 우리는 연신 "그래, 이 맛이지."를 연발했다.


등산으로 소수 부족이 사는 마을로 들어가 1박을 했다. 동네는 조용하고 수공예품을 만들어 파는 일을 주업으로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목에 황동으로 된 링을 끼고 있었고 나이가 많을수록 개수가 더 많았다. 한편 안돼 보이기도 하지만 얼굴은 편하고 삶에 찌들어 있지도 않았다. 저녁이 되어 간단한 식사를 한 뒤 가이드랑 같이 한 곳에서 자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밤새 뒤척이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른다. 아침이 되니 가이드는 없어지고 카메라가 사라졌다. 우리는 하산을 하고 가이드를 찾아 나섰다. 다행히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필름 인화를 하러 왔다는 말만 할 뿐 횡설수설했다. 어쨌든 짐을 찾고 우리는 방콕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마지막 남은 여행의 밤이 아쉬워 가장 비싼 저녁을 먹기로 했다. 방콕은 야시장이 유명해 선물로 기념될만한 것을 사고 일본식 샤부샤부 전문점에 가서 거하게 저녁을 먹었다. 각종 야채와 해물, 고기 등을 육수에 담가서 건져 먹는 요리였다. 그래 봤자 우리 돈으로 1바트가 30 원하던 시절인데 인당 2만 원 정도의 식사를 했던 것 같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벌벌 떨었던지. 밤거리를 걸어보고 숙소로 돌아와서 아침 비행기로 서울로 돌아왔다.


치앙마이 사원


그때 뉴스에서 한창 동남아에 전염병인 페스트가 유행하느라 부모님과 동료들이 위험하다며 만류했었는데. 만약 그때 떠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방콕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느꼈던 젊은 날의 시간이 없었을 테고, 치앙마이에서의 추억도 갖지 못했겠지. 한 번쯤 시간을 되돌려 본다면 다시금 그때로 돌아가 봤으면 한다. 무모하리 만치 겁 없던 그때로.


어딘가로 떠나는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가는 것이라 한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더 활기차게 살 수 있기에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떠났던 1994년은 세련되지 않았고 방콕을 오가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불교국가로의 여행은 이국적이나 편하지만은 않았고,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을 만났던 시간이었다. 되도록 많은 경험을 하려 시간을 아끼던 시절, 눈에 담고 오고 싶은 많은 풍광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겁 없이 돌아다니던 젊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여행이란 여유를 느끼고 싶어서 삶을 재정비하는 시간이 아닐까. 우리는 날마다 쳇바퀴를 돌듯 바쁜 생을 살고 있다. 그러다 지쳐서 훌쩍 떠나는 짧은 여행은 삶에 쉼표요 더 잘 살아내기 위해 나에게 주는 선물이 아닐까. 오늘 다시 한번 가방을 싸고 싶어졌다. 비록 젊음은 지났지만 지금 내 인생에 가장 젊은 날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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