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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림 Aug 01. 2022

일상의 잔잔함에 깃든

<8월의 크리스마스> 리뷰, 1998, 한국, 허진호


별 기대 없이 보고 감흥이 없던, 당시의 톱스타가 나온  영화치곤 너무 평범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기억에 없던 영화였는데 지금에서야 다시 보니 뭔가 다른 느낌이랄까. 단지 정원이라는 시한부 주인공과 예쁜 다림의 만남이라서가 아니라 끝까지 어떤 질병이었는지, 눈물이나 슬픈 대사 한마디 없는 게 답답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내 기억에서 지워진 이유였나 보다.  


다시 보니 남주인공의 질병 이름도 중요치 않고 감정의 소비나 눈물, 서로에게 향하는 열렬한 사랑의 열병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가 무얼까. 정말 평범한 끌림과 마지막 주인공의 전하지 못한 편지의 레이션으로 마무리된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감사합니다"


가장 아픈 장면은 정원이 일터를 옮긴 다림을 찾아 카페 안 창밖으로 지긋이 바라보는 눈길에 있다. 그 장면을 보면 지금도 자꾸 마음 한편이 아리고 나설 수 없었던 남자의 마음이 어떨지 충분히 이해된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혼자 바라만 보고 보내야 했던, 잠시 가졌던 따뜻했던 마음을 아련하게 떠나보내는 마음. 아프다고 애써 말하지 않아도 눈길이 말하는 듯이 전해졌으니까.


또 한 장면은 아버지께 비디오 사용법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된 리모컨 사용법을 알려주는 장면은 왠지 모를 슬픔이 배어있다. 홀로 남게 될 아버지를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는 모습들. 사람이 자기의 마지막을 알고 혼자 준비하는 마음은 어떨까. 가족의 마지막을 알고 준비하는 사람의 마음은 차라리 자기의 끝이 언제인지 모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다.


얼마나 기다리고 궁금하고 늘 제자리에 있을 거라 믿었던 사람이 말없이 사라졌을 때의 상실감 때문에 다림은 돌을 던져 유리창을 다. 앵글 안 가득 채우는 화가 난 울분의 표정으로, 숨길 수 없는 게 감기와 사랑의 감정이란다. 뜨겁거나 격렬한 사랑의 언어, 행동이 없어도 서로의 마음에 닿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랑은 그렇게 마음에 스며드는 것인가 보다. 아무 말 없이 사라져 궁금하고 사정을 알 수 없어 화가 나는 그 시간들을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 마지막 장면에서 사진관에 걸려있던 사진 한 장으로 위로받는다.


자신의 영정 사진을 직접 찍는 마음은 마지막을 스스로 담담하게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에 있다. 활짝 웃는 모습으로 좋게 기억되고 싶었던 그의 마음이 담겨있기에 '나는 잘 살다 간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쩌면 자기의 마지막을 알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으나, 한편 준비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야말로 남과 다른 축복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지난 사랑은 늘 아름다워 보인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진부한 내용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어둡거나 험한 말, 눈물이 나 슬픈 대사 한마디 없이 이어지는 화면의 전개가 수작이라 할만하다. 슬픔을 이렇게 담아낼 수도 있구나. 슬픔을 반드시 슬프게 담아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되려 슬프지 않고 담담하게 담아내서 더 슬픔이 배가 된 그런 느낌의 영화였다.


젊을 땐 슬픔은 슬퍼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슬프지 않아도 밀려오는 아픔과 담담함이 때로 더 가슴 시리게 다가올 때가 있다는 것을, 아마도 그런 서사를 통해 이 영화가 말없이 전개되는 장면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말하지 않아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전달하고 있다고.


제목을 보고 느끼는 첫 번째 감성은 마음이 들뜨고 풍족한, 연인에겐 중요한 날인 크리스마스라는 단어에 있다. 사랑이라는 마음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말로 봐서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진심으로 좋아했다는 게 드러나니까. 온통 회색빛에 어둡고 침울한 장면 하나 없이 밝은 여름빛처럼, 흐르는 땀에 선풍기를 돌려놔 줄 수 있는 마음이다. 아마도 그런 밝음을 통해 주인공이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생각의 단편을 알려주고 있는 게 아닐까. 춥고 힘든 겨울이 아닌 햇살이 충분히 비치고 있는 여름이라는 시간 동안 마음에 스며든 따뜻한 마음을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로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사랑은 마치 열병과 같아서 햇빛처럼 골고루 비치고 피어나는 선물과도 같은 감정이라고, 크리스마스 같은 선물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일상으로 보내는 잔잔함이 실은 아주 특별함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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