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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공 Oct 11. 2021

예술을 과식하다

홍콩에서 머문지 여든두 번째 날

   사실 아트 바젤이라는 행사에 대해 잘 몰랐었다. 알고 난 뒤에도 미술 전시는 언제나 환영이다만, 가격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어서 못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기회로 티켓을 두 장을 얻게 되었다. 마침 도리가 나를 보러 홍콩에 또 오기로 한 날이 아트 바젤 기간 중이라 함께 전시에 가기로 했다. 도리에게 같이 가자는 얘기를 할 때만 해도, 아트 바젤이 얼마나 거대한 행사인지 알지 못했다. 

   침사추이 선착장에서 도리를 만나 페리를 타고 센트럴로 넘어가 배부터 채울 계획이었다. 선전에서 사는 도리는 선전발 침사추이행 버스를 타고 오고 있었다. 중국에서 침사추이에 오는 사람들의 가장 큰 목적이 쇼핑이라는 걸 반영이라도 하듯 버스는 하버 시티라는 대형 쇼핑몰 앞에 사람들을 내려준다. 도리는 대뜸 본인은 침사추이행 티켓을 샀는데 하버 시티에 내려준다고 해서 크게 화날 뻔 했다는 메세지를 보냈다. 약속 장소로 걸어가며 그 메세지를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목적지가 여의도인 버스 티켓을 샀는데, 63빌딩 앞에 내려줘서 화가 났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귀여운 착오였다. 

   도리가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나는 지하철을 타고 침사추이 역으로 갔다. 침사추이 역에는 출구가 무시무시하게 많다. 몇 달 살아도 적응이 되지 않더라. 조금 헤매다가 선착장 앞에서 도리를 만나 함께 페리에 탑승했다. 

   날이 흐렸다. 흐린 날이라고 계획해두었던 페리 탑승을 미루거나 취소할 필요는 없다. 흐린 대로 타는 맛이 있다. 

페리에서 보는 센트럴의 풍경


전시 보러가기 전에 로푸키에서 배를 채우고

   점심은 센트럴의 '로푸키'라는 식당에서 해결했다. 처음부터 로푸키를 먹으려던 건 아니었다. 카우키 레스토랑에 갔다가 대기줄이 너무 길어 로푸키로 발걸음을 돌렸던 것 같다. 아트 바젤을 여유 있게 관람하기 위해 식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 


   로푸키는 신서유기 덕분에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식당이다. 방송에 출연하는 맛집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수근과 강호동이 로푸키의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고 연신 감탄하는 모습이 기억에 깊이 남았다. 사실 소고기 죽과 완탕면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맛의 범위가 정해져 있는 음식이다. 그런데 그런 평범한 음식에 크게 감탄하길래 얼마나 맛있길래 그러는지, 항상 궁금했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이 날로부터 한 달 전 즈음 로푸키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는 소고기 죽과 홍콩식 짜장면, 그리고 새우 만두 튀김을 주문했다. 로푸키의 소고기 죽은 맛있었다. 그렇지만 홍콩에는 죽집이 굉장히 많고, 평균적으로 맛이 훌륭하기 때문에 로푸키의 소고기 죽이 홍콩의 다른 식당보다 뛰어나게 특별한 점은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로푸키는 센트럴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식당보다 같은 메뉴를 조금 더 비싸게 판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홍콩식 짜장면과 새우 만두 튀김은 로푸키가 독보적이라고 할 만 하다. 홍콩에 사는 동안 해당 메뉴를 파는 식당을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이는 내가 광둥어를 읽을 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두 메뉴는 한국에서 찾기 힘든 맛인 동시에 한국인의 입맛에 딱 맞는다. 사실 어느 문화권의 사람이 와서 먹어도 맛이 깔끔하게 좋다고 느낄 것이다. 

   두 번째 방문이었던 이 날은 홍콩식 짜장면, 새우 만두 튀김, 그리고 완탕면을 주문했다. 역시나 세 음식의 맛이 모두 훌륭했다. 그렇지만 완탕면은 소고기 죽과 마찬가지로 로푸키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맛있고 저렴하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가성비가 최고라고는 할 수 없겠다. 나는 이미 아는 맛이니 적당히 잘 먹었고, 이 날은 먼 길을 온 도리가 맛있게 먹는 게 더 중요했다. 다행히 도리도 만족하며 먹었다. 

밥을 먹고 센트럴 역으로 향하는 길


   식사 후 센트럴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어드미럴티 역으로 이동했다. 아트 바젤은 완 차이의 컨벤션 센터에서 진행되었다. 컨벤션 센터가 완 차이의 랜드마크이기 때문에 왠지 완 차이 역에서 내려야 할 것 같지만, 의외로 어드미럴티 역에서 내려야 도보 거리가 더 짧다. 

   어드미럴티 역에서 컨벤션 센터로 걸어가는 길에 중앙 정부 청사 옆을 지났다. 정부 청사 건물은 외적으로는 아름답지만, 홍콩 시민들에게는 억압, 분노, 불신 등의 감정과 연관되어 있을 수 있겠다. 정부 청사 앞의 타마르 공원도 둘러볼 만 하다. 여유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라 맑은 날이면 나들이 온 시민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내가 홍콩에 머무르던 때에는 시위가 일어나지 않고 있었지만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얼마 후부터 범죄인 인도법안으로 인해 시위가 본격화되었다. 이전의 우산혁명 때부터 타마르 공원은 시위의 요지 역할을 했다. 입법부 또한 정부 청사와 타마르 공원 바로 옆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타마르 공원이 현재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귀여운 우산 모자를 쓰고 입법부 (혹은 정부 청사?) 건물을 청소하는 직원, 2019.03


인생에서 본 중, 가장 거대한 전시장에 입성!

   전시장의 첫인상은 예상한 대로 시설은 좋고 사람이 많다는 정도였다. 행사장에 입장하여 이십 분 정도 둘러보고 났을 때, 내 첫인상은 심각한 과소 평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시의 규모는 말이 안 될 정도로 컸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서른 여섯 개국의 이백여 개 갤러리가 참여하여 총 삼천 점 정도의 작품이 전시되었으니 말이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배우 정우성, 이정재 그리고 그의 연인인 임세령 대상 전무 등도 방문했다고 후에 기사로 접했다. 이렇게 규모가 큰 전시인 줄 방문 전에 알았다면, 어느 갤러리의 어느 작가 작품을 집중적으로 볼 것인지 간단히라도 조사했을 것이다. 


   도리와 나는 무방비 상태로, 거대하고도 예술적인 미로에 갇힌 것 같았다. 어디에서 무엇을 봐야할 지 생각하기는 커녕, 축구장 같은 전시장 안에서 길이나 잃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저 길이 난 대로 걸으며, 나를 상하좌우로 둘러싼 작품들을 자유롭게 감상했다. 말 그대로 상하좌우였다. 천장에도, 바닥에도 입체적인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하루 동안 가장 많은 미술 작품을 마주했다.

   바깥과는 다른 세상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실제로 구현하여 한 공간에 모두 모아놓은 것과 마찬가지니, 에너지가 가득했다. 전시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의 분위기도 바깥과는 달랐다. 젊고 생동감이 넘치는 분위기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젊음은 나이 뿐 아니라 감각도 의미한다. 자신이 잉태하고 낳은 작품을 팔기 위해 온 작가들도, 작품 감상이라는 우아한 방식으로 쾌락을 즐기러 온 관객들도 생기를 내뿜을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내가 만난 작품들

   단일 주제를 갖는 전시회에서는 작품 설명도 읽어보고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서는 깊게 음미도 한다. 그렇지만 아트 바젤은 각국의 작품을 한데 모아 판매하는 것이 주 목적이라 일관된 주제도 없고 작품의 개수가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여러 작품을 두루두루 접하는 것이 적합한 감상 방법이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을 지나가며 감상하고 정말 흥미로운 작품만 찬찬히 뜯어봤다. 인상 깊었던 작품 몇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멋진 작품들을 많이 만났고 사진도 그만큼 많이 찍었기에,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지만 저작권 문제로 그럴 수 없는 점이 아쉽다. 글로라도 묘사하고자 한다. 여러 훌륭한 작품들 중에서도 유독 감명을 준 작품이 있다. 작품의 형태는 그림이나 편집된 사진이었고, 반인반수를 담았다. 전반적으로는 인간이지만 신체의 일부는 돼지의 특징을 가진 여성이 나체로 뇌쇄적인 자세를 취한다. 피부는 분홍색이며, 돼지의 코와 입이 그려진 입마개를 쓰고, 돼지처럼 여섯 개의 젖가슴을 가진다. 사람의 몸에 젖가슴이 여섯 개 달린 모습을 처음 마주했을 때는 낯설어 살짝 불쾌감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액자에 붙은 스티커의 문구를 읽고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영어로 적혀있었는데 번역하자면 대강 이렇다. 동물들이 고통을 느낀다면, 기쁨과, (성적인) 황홀감과 욕망도 느끼지 않겠는가.

   작품을 보고 처음 느낀 불쾌감은 그 크기만큼 깨달음으로 돌아왔다. 어찌 보면 충격요법이다. 동물이 감정과 감각에 있어 인간과 동등하다는 근거를 들 때 보통 고통의 감각이나 슬픔, 기쁨, 모성애, 정 등의 감정을 제시하지, 쾌락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육식과 축산업을 멈추어야 한다는 주장에 사람들이 무뎌져 가는 즈음에 이 작품에 담긴 아이디어가 논의의 차원을 확장할 수 있다. 물론 동물이 성적인 황홀감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육식을 멈추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는 동물이 인간과 조금 더 동등한 존재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해당 작품에는 축산업을 중단하라는 문구도 담겨있었고, 이는 보다 직설적으로 작가의 주장을 드러냈다. 

   몇 개의 연작이 있었다. 여성이 뱀의 얼굴과 피부를 가지고 역시나 뇌쇄적인 자세를 취하는 그림도 있었다. 해당 그림의 액자에도 맥락을 공유하는 몇 가지 문구가 적혀 있었다. 파충류의 가죽은 파충류의 것이니, 네 살가죽이나 키우라는 재미있는 내용도 있었다. 당시에는 작가의 이름을 알아오지 못했다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줄리아나 헉스테이블(Juliana Huxtable)이라는 전방위 아티스트이다. 


   넓고도 넓은 전시에서 아쉽게도 단 두 명의 작가의 이름만 기록해왔었다. 당시에는 그저 하나라도 더 보기 바빴기 때문이다. 내가 이름을 기록한 첫 번째 작가는 나티 우타리트(Natee Utarit)다. 참여한 갤러리와 작가들이 모두 같은 크기의 공간을 배정받지는 않았었는데 나티 우타리트는 상당히 큰 공간을 배정 받았다. 그는 거대한 작품을 여럿 전시할 수 있었다. 공간 배정에는 아무래도 인지도와 작품의 가치가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미술에 관해 전문적인 식견이 없는데도 나티 우타리트의 작품은 눈에 확 띄었다. 그의 작품에는 해골이 자주 등장하며, 여러 요소에서 종교적이고 역사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엿볼 수 있었다. 또 현재와 과거가 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도무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고, 몽환적인 배색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감상이었다. 

   나티 우타리트의 작품처럼, 주변에 비해 돋보이는 작품이 또 있었다. 대체 어떤 훌륭한 작가 분이신지 이름을 확인했더니 그 유명한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였다. 예술은 감상하는 사람 나름이라지만 많은 경우에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이미 대중을 홀린 적이 있는 것을 보면 보편적인 아름다움은 정말 존재하나 보다. 

   에곤 쉴레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공간도 따로 있었다. 방 형태처럼 구성하여, 줄을 서서 입장해야 했고 동시간에 정해진 인원만 입장이 가능했다. 명성에 걸맞게, 줄이 꽤나 길어 나와 도리는 포기했다. 한국에서 데이비드 호크니나 에곤 쉴레의 작품을 만나고 싶으면 몇 년에 한 번씩 열리는 단독 전시를 기다려야 한다. 이 작가의 작품들을 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니, 아트 바젤이 얼마나 대규모의 행사인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갈 수 있어 정말 운이 좋았다. 

   아트 바젤 공식 홈페이지에 가면 전시에 올랐던 모든 작품을 볼 수 있다(https://www.artbasel.com/artworks?medium=-1&showIds=701&sortBy=random). 2019년에 전시된 작품만 3065점이니 십 분의 일 조차도 확인하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총 한 시간 반 정도 감상했다. 한 시간 반 동안 앉지 못하고 계속 걷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지만, 작품 감상에 소비한 에너지가 더 컸다. 각 예술 작품은 작가가 오랜 시간 에너지를 들여 탄생한다. 감상하는 이가 그 힘을 전부 다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일상에 비하면 강렬한 자극이다. 그런 작품을 수백 점 감상하니, 지치지 않을 리가 만무하다. 전시장을 벗어날 때쯤에는 기진맥진하여 작품들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어느 정도 이상은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전시장을 벗어나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전시가 막을 내리는 직전까지도 컨벤션 센터는 사람들로 붐볐다. 


홍콩에서 먹는 뿌링클 치킨

   어드미럴티 역에서 세 정거장을 지나 야우 마 데이 역에서 하차했다. 야우 마 데이는 침사추이와 몽콕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그 둘에 비해서는 덜 유명하지만 충분히 볼 거리가 많은 곳이다. 침사추이와 몽콕이 로컬 홍콩의 색채가 더 강렬하고, 야우 마 데이에는 거기에 서양스러움이 조금 더해졌다고 볼 수 있겠다. 내가 야우 마 데이를 좋아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를 들자면 BHC 치킨 매장이다. 우리가 아는, 한국의 BHC가 맞다. 

   로푸키는 소화된 지 오래였고, 도리와 나는 허기가 매우 져있었다. BHC 매장에서 뿌링클 치킨과 치즈볼을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며 도리에게 드래곤스 백에 갔을 때 찍고 이후에 인화한 필름 사진을 몇 장 주었다. 도리는 사진을 여러 번 뜯어보며, 아기 때 엄마가 만들어 준 앨범 이후로는 인화 사진을 처음 받아본다며 너무나 좋아했다. 필름 사진 촬영이 취미라 인화를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는데, 이렇게 반응을 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남이 나온 사진은 내가 보관하는 것보다는 당사자가 보관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준 것 뿐인데, 괜시리 뿌듯하고 내가 더 고마웠다. 

   음식이 나왔을 때 세상에 치킨과 나만 있는 것처럼 몰입해서 먹었다. 한국에서는 별 다른 생각 없이 먹는 음식도 해외에서는 귀할 때가 많다. 맛에 향수가 작용하면 배로 맛있어진다. 그런데 향수만이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홍콩의 BHC 치킨은 한국 지점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처음에는 향수 때문인 줄 알았지만, 여러 번 먹어보고 한국에서 다시 같은 메뉴를 먹었을 때 확실하게 깨달았다. 홍콩에서 사용하는 닭이 더 맛있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해본다. 물론 홍콩 매장의 가격대도 더 높긴 하다. 

   배 부르게 먹고 근처에서 디저트까지 해결하고 귀가했다. 일 년치 미술 작품은 모두 감상했다고 생각했는데 몇 주 뒤에 나는 센트럴의 에이치 퀸즈(H Queen's) 갤러리에 방문해서 또 다시 예술을 과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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