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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공 Oct 11. 2021

뉴 테리토리즈의 서쪽 끝, 틴 수이 와이

홍콩에서 머문지 여든아홉째 날

새로운 동네, 그리고 새로운 교통수단

   홍콩에서 지내는 동안 홍험이라는 동네에서 거주했다. 선전 여행기에서 말했듯이 나름 교통의 요지라,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다녀올 수 있었다. 홍험 동네 자체도 즐길거리가 많아, 심심하지 않은 동네였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동네더라도 몇 달을 살고 나면 반복되는 일상의 배경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가끔씩 비일상의 기분을 느끼기 위해 다른 동네의 호텔을 예약하여 일박 이일 여행 기분을 내고는 했다. 총 네댓 개의 호텔을 방문했다. 

   호텔을 예약할 때 가격대나 별의 개수 정도만 고려하여 쉽게 고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모든 사진과 후기를 꼼꼼히 읽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잠자리에 예민하기 때문에 후자에 속한다(사실 거의 모든 것에 예민하다). 호텔즈컴바인 웹페이지에서 홍콩의 모든 호텔을 후보로 놓고 검색을 하다가, 시설도 가격도 괜찮은 호텔을 발견했다. 이름은 '호텔 코지 웻랜드(Hotel COZi Wetland)'로, 코지라는 명칭은 공유하면서 뒤에 붙은 단어만 다른 호텔이 몇 곳 있는 걸로 보아 호텔 프랜차이즈로 추정되었다. 모두 신식 시설을 갖추었고 가격대도 좀 나가는데, 웻랜드 지점만 저렴했다. 사성급 시설에 가격은 평일 기준으로 한화 사만 원 정도였다. 홍콩 뿐만 아니라 한국 기준에 대봐도 가성비가 믿을 수 없는 정도였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자세히 봤더니 역시나, 도심에서 상당히 멀리 위치해 있었다. 거의 중국 본토와의 국경 쪽에 있는, 틴 수이 와이라는 동네에 있었다. 

   그렇지만 그 단점은 단기 여행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홍콩에 네댓 달 머무르는 나에게는, 거리의 이점을 가격적인 이점으로 대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도심보다는 땅값이 저렴한 지역이라 그런지 방의 크기도 더 커보였다. 우선 호텔 방문은 확정으로 하고, 주변에 둘러볼 것이 있나 지도를 살폈다. 홍콩 지도를 전반적으로 살필 때마다 북서쪽에 위치한 방충망 모양의 땅이 묘하게 신경 쓰였었는데 호텔이 바로 그 옆에 위치해 있었다. 알고 보니 방충망 모양의 땅이 습지고, 그래서 호텔의 이름에도 'Wetland'라는 단어가 들어있던 것이었다. 이참에 내 눈으로 방충망 모양 땅을 확인하고 와야지. 또 나는 홍콩에 사는 내내 멋진 노을을 보기를 갈망했었는데 마침 호텔도 해가 지는 서해안 근방에 위치해 있었다. 틴 수이 와이 지역에 방문한 데에는 이렇게 나름의 근거들이 있다. 

   호텔을 예약한 당일 점심 느즈막히 안돌이를 만나 함께 홍험 역으로 향했다. 상당히 먼 곳이지만 가는 데에 한 시간도 걸리지 않기 때문에 여유있게 떠나도 되었다. 홍험 역에서 틴 수이 와이 역까지는 지하철로 정확히 삼십 분이 걸렸다. 급행 지하철도 아닌데 서울 지하철 5호선의 김포공항 역에서 강동 역 정도 거리를 삼십 분에 주파하는 수준이다. 그저 경이로웠다. 홍콩에 살면서 한국이 세계 최고인 줄 알았던 것들에 대한 환상이 몇 번 깨졌는데, 그 중에 하나가 지하철이다. 이십 대 초반 일본에서 지하철 환승할 때 진땀을 빼고 온 이후로, 지하철은 역시 한국이 최고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홍콩 것이 훨씬 빠르고 승차감도 좋더라. 애국심에 초반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던 바지만 틴 수이 와이를 가는 길에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이 카오룽 지역을 벗어나 뉴 테리토리즈 지역에 진입하면서 창밖의 풍경이 달라졌다. 땅 위를 채우는 것들의 밀도가 점점 낮아졌다. 고층 빌딩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사람과 차 대신에 나무와 산이 시야의 대부분을 채웠다.

   홍콩의 지역 구분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겠다. 한반도를 팔도로 구획하듯 홍콩도 카오룽, 홍콩 섬 그리고 뉴 테리토리즈의 세 개의 큰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한반도의 팔도는 면적 측면에서 꽤나 공평하게 나누어졌지만, 홍콩의 세 지역은 그렇지 않다. 면적을 비교하자면 뉴 테리토리즈가 국토의 85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러나 국가 인프라의 밀집도는 정반대이다. 우리가 홍콩에 대해 갖는 화려한 이미지는 모두 국토의 겨우 15퍼센트를 차지하는 카오룽과 홍콩 섬의 것이다. 뉴 테리토리즈에도 우리나라의 일산, 판교 등의 신도시에 비할 만한 주거밀집촌이 가끔 있으나, 그 외의 지역은 대부분 미개발 상태로 남아있다. 이런 불균형한 개발이 홍콩 주거문제 원인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웨스트 레일 노선 지하철 위에서 본, 뉴 테리토리즈의 캄 틴(Kam Tin) 근방


   틴 수이 와이 역은 그간 가 본 다른 역들에 비해 승강장과 대합실이 넓었다. 뉴 테리토리즈 지역은 도심에 비해 공간을 더 넓게 쓰기 때문에 가능한 바다. 틴 수이 와이는 뉴 테리토리즈 중에서도 도심인 카오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이다. 그래도 주변에 비해서는 발달이 되어 있다. 중국 선전과 왕래가 편해 지역 경제적으로 이득을 보기 때문이다.

틴 수이 와이 역의 대합실. 널찍하며 깔끔하다. 2019.04


   길을 미리 검색했을 때 구글 지도는 호텔에 가려면 틴 수이 와이 역에서 705번으로 환승하라고 안내했다. 근데 705번이 어떤 교통수단인지는 정확히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705번 옆에는 트램을 닮은, 처음 보는 기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트램은 분명 홍콩 섬에서만 다니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뉴 테리토리즈에도 있는 건가? 그렇다면 구글 지도는 왜 홍콩 섬의 트램과 뉴 테리토리즈의 트램에 대해 다른 기호를 사용하는가? 홍콩 섬의 트램은 705번 같은 숫자 노선을 사용하지 않는데, 뉴 테리토리즈의 트램은 조금 특별한가? 사실은 트램이 아니라 전기 버스인가? 이렇게 혼자 많은 추측을 했지만, 어느 하나 명쾌하지 않았다. 안돌에게 이러한 궁금증이 있다고 이야기하니 그 정체불명의 기호는 트램이 아닌 경전철(Light Rail)을 의미한다고 알려주었다. 안돌이 원래 각종 교통 수단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구글 지도도 알려주지 않는 것을 알고 있을 줄이야. 안돌은 내가 트램 타는 것도 좋아하니, 경전철 탑승도 새롭고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틴 수이 와이 역에서 경전철로 환승하러 가는 길이 상당히 설레었다. 홍콩에 산지 세 달이 된 시점에서 또 새로운 교통 수단에 탑승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다른 경전철이 도로 위를 달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차도 위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달리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기다란 버스 같기도 했지만, 외관은 분명히 지하철이었다. 홍콩 섬의 트램과 비교하자면, 도로 위를 달리는 점 그리고 차량 위에 전선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동일했다. 그렇지만 트램은 두 층이며 한 량만으로 구성되어 있고, 경전철은 한 층이며 두 량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또한, 트램의 외양이 전통적인 전차에 가깝다면, 경전철은 현대식 지하철의 작은 버전처럼 보였다. 

틴 수이 와이 역. 저 멀리, 노란색 이층 버스 앞으로 지나가는 경전철을 볼 수 있다. 2019.04


   환승을 위해 교통카드 단말기에 옥토퍼스 카드를 대고, 드디어 705번 경전철에 올랐다. 외관은 영락없는 지하철이지만 특이하게도 내부는 버스 같았다. 홍콩의 경전철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버스, 지하철, 그리고 트램을 짬뽕하여 만든 교통수단인데, 그 과정에서 아기자기함을 한 숟가락 가미했다고 하겠다. 

705번 경전철에 오르는 길, 2019.04


   총 여섯 정류장을 거쳐 틴 사우(Tin Sau) 경전철 정류장에 내렸다. 경전철은 차체가 귀여울 뿐 아니라, 정류장도 상당히 아기자기했다. 끽해야 지하철 두 량이니, 정류장이 클 필요가 없다.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기차역이 갖추어야 할 기능적인 요소 뿐 아니라 감성적인 요소까지 모두 갖고 있었다. 자갈이 가득한 선로, 커다란 전봇대를 따라 연결된 전선들, 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도록 설치된 간이 천장 같은 것 말이다. 여행 온 기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나처럼 여행을 온 사람들도 있지만 역 이용객의 대부분은 근방 주민들 같아 보였는데, 이런 기차역을 매일의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기분은 어떨지 궁금했다.

틴 사우 경전철 역, 2019.04

틴 사우 경전철 역, 2019.04

틴 사우 경전철 역, 2019.04

틴 사우 경전철 역, 2019.04


   목적지인 코지 호텔은 틴 사우 역 코 앞에 있었다. 호텔을 예약할 때부터 호텔의 외양이 세련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번쩍번쩍했다. 이 곳이 우리가 단돈 사만 원에 묵을 호텔이라니, 호텔에 들어가기도 전에 크게 설레었다. 그리고 건물 측면에 적힌 황금빛 'M'자를 봤을 때, 나와 안돌은 더 크게 흥분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데, 그때는 그렇게 맥도날드에 환장했다. 서울에서 지내는 요즘은 맥도날드에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데도 거의 가지 않는다. 그런데 홍콩에 있을 때는 맥도날드를 너무 좋아했다. 다른 먹을거리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냥 홍콩의 맥도날드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경험이 너무 즐거웠다. 아마 스물네 시간 열린 식당 중 가장 만만한 곳이 맥도날드이고,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 야식을 먹는 것은 일탈이자 즐거운 경험이기 때문에 그런 기억과 맥도날드가 연결되었기 때문일 거다. 

코지 호텔 웻랜드, 2019.04

코지 호텔 웻랜드, 2019.04


   호텔의 직원 분들은 모두 친절했고, 하룻밤에 사만 원이라는 가격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방은 넓고 깔끔했다. 이후에 홍콩의 중심지에 가까운 사이 잉 푼의 라마다 호텔에 갔을 때는 조금 더 비싼 가격에 침대 하나 겨우 들어가는 방을 배정 받았었다. 코지 호텔 웻랜드는 홍콩 뿐만 아니라 근 몇 년간 갔던 국내외 호텔들을 통틀어 가성비로는 최고였다. 아쉬운 점이 단 하나 있었다면 보통화를 사용하는 옆 객실 손님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소음이 벽을 타고 넘어왔다. 호텔에 오기 전 미리 읽어본 이용 후기에서 비슷한 애로사항을 겪은 사람을 이용 후기를 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중국 선전에서 차를 타고 오기가 상당히 편해 보통화를 사용하는 중국인 손님이 많은 곳이니 어쩔 수 없었다. 


'웻랜드'의 정체를 확인하러

   이 곳에 오며 크게 세 가지를 기대했는데, 좋은 호텔, 방충망처럼 모양이 난 습지, 그리고 서해안의 노을이었다. 첫 번째는 확인을 했으니, 습지를 보러 갈 차례였다. 호텔을 나서 홍콩 습지 공원(Hong Kong Wetland Park)으로 향했다. 주위를 살펴보고 중국 선전과 가까워서 그런지 홍콩의 다른 지역보다 건물도 큼직큼직하며 선전 지역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말 중국 본토처럼 경찰 여럿이 길거리에 서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틴 수이 와이의 아파트촌, 2019.04


   우리는 습지와, 습지의 북쪽에 위치한 마이 포 자연 보호구역(Mai Po Nature Reserve)에 모두 방문하고 싶었다. 막상 찾아보니 마이 포 자연 보호구역은 생각보다 교통이 불편해서 포기했다. 알고 보니 방문하려면 사전 예약도 필요했다. 습지는 홍콩 습지 공원에서 입장권을 구매하고 구경할 수 있는 시스템인데, 공원의 폐장 시간에 가깝게 도착하여 입장권을 구매할 수 없었다. 아쉬웠지만 미리 더 자세히 알아보지 않은 자의 업보였다.

   유료 공간에는 입장할 수 없었지만 무료 공간도 충분히 좋았다. 풀숲으로 만들어진 미로가 있었는데, 아이들이 뛰놀기 좋아 보였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 잔디도 넓게 깔려있어 편안하게 쉬기 좋았다. 그리고 오르막길의 끝에는 습지를 일부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주변의 구조물에 시야가 막힌 점이 아쉽긴 했으나, 방충망 모양의 땅이 실제로는 어떻게 생겼는지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습지 뒤로 선전의 빌딩 숲도 볼 수 있었다.

홍콩 습지 공원, 2019.04

홍콩 습지 공원, 2019.04

홍콩 습지 공원, 2019.04

홍콩 습지 공원, 중국 선전이 보인다. 2019.04


노을 사냥, 첫 번째 성공

   잔디밭을 충분히 즐기고, 호텔로 돌아가 잠깐 휴식을 취했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피곤해서 더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노을에 대한 집념은 저질스러운 체력의 영향을 이길 정도로 강했다. 서해안 중 어디로 가야 예쁜 노을을 봤다고 소문이 날까. 구글 지도에서 바다에 닿아있는 해안선을 쭉 훑다 'Lau Fau Shan Shoreline'이라는 장소명이 눈에 띄었다. 이 근방에는 중국인 관광객이 많아서 그런지 장소명이 영어로 병기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해당 장소는 영어로 표기되어 있어 눈에 더 띄기도 했다. 리뷰가 많은 편은 아니나, 이 곳에서 멋진 노을을 본 사람들이 많군. 그리고 바로 앞에는 수산시장이 꽤 크게 있군. 바로 여기다. 망설임 없이 목적지를 정하고, 호텔 프론트 직원 분의 도움을 받아 택시를 잡아 탑승했다. 가는 길에 택시에서 창밖을 봤을 때 근방은 정말 시골이었다. 이 날로부터 두 해 그리고 두 달이나 지났지만 수산시장 입구에서 하차했었다는 게, 그리고 그 주변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또렷이 기억난다. 근처의 한적한 시골과는 다르게 수산시장 입구엔 관광객이 꽤 있었다.

   목적지에 가려면 라우 파우 산 시장(Lau Fau Shan Market)을 통과해야 했다. 시장은 한국의 수산물시장이나 전통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은 촌스러운 기념품, 전통 과자 등을 파는 가게도 있었고, 대부분의 가게들은 건어물이나 생선을 팔고 있었다. 해산물 요리를 파는 식당도 정말 많았다. 가야한다면 어느 곳을 골라야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말이다. 여느 수산시장처럼 비린내가 가득했다. 나는 삼면이 바다인 나라에서 자랐으며, 해산물 마니아이다. 어렸을 적부터 부산의 자갈치 시장, 노량진 수산시장 등을 다니며 코를 단련한 바 있지만, 안돌은 해산물이 흔하지 않은 내륙지방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해산물에 반감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날 생선 냄새는 거의 맡아 본 적이 없어서, 음식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해산물 냄새에 많이 힘들어했다. 

   다행히 수산시장을 벗어나자 냄새가 좀 나아졌다. 냄새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눈 앞에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에 후각에서 시각으로 주의를 옮길 수 있었다. 갯벌은 거대했고, 고대하던 멋진 일몰은 한창이었다.


   왜 그렇게 노을에 집착을 하는지 짧게 이유를 대보려 한다. 이십대 초중반 사이 어딘가의 나이를 먹었을 때, 내 자신을 알아가는 재미에 한참 빠져있었다. 어떤 지점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도 많이 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이 그려내는 무수한 그림과 패턴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늘이 평소와 다른 패턴을 그리면, 억지로 만들어내기도 힘든 예쁜 색을 만들어내면,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과한 감성으로 치부하겠지만 하늘만 봐도 행복한 시절이 몇 년간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아름다운 하늘을 보면 좋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좋은 걸 많이 봐서 무뎌진 것인지, 그 정도로 행복해지기에 현실이 너무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없다.

   홍콩에 있는 동안에도 정성을 다하여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았다. 홍콩에서 표류한 몇 달을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는 과정이라고 요약해도 무리가 없다. 홍콩의 아름다운 모습을 대개는 우연하게 발견했지만 애초에 정해놓고 집요하게 쫓아다닌 목표물도 있었다. 바로 노을이다. 처음 몇 달은 실망스러웠다. 서울의 한강 근처에서 화려한 노을을 많이 볼 수 있으니까, 강보다 큰 바다를 끼고 있는 홍콩에서는 당연히 한국에서보다 멋진 노을을 더 많이 볼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 홍콩 살이 초반에 페리를 타며 한두 번 멋진 노을을 보긴 했으나, 기대만큼 다채롭지는 않았다. 한두 달 지나 겨울이 가고 봄이 오니 도심에서도 썩 괜찮은 노을을 간간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붉은 빛으로 하늘을 가득 채우는,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은 그런 신비로운 일몰은 여전히 보지 못했었다. 구글 리뷰에 멋진 노을을 봤다는 사람이 있어 그곳에 가도 왜 그 사람들 카메라 앞에만 나타나는건지, 내 앞에는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바다에 가도 산에 가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되돌아보면 홍콩 하늘에 맡겨놓은 일몰이라도 있는듯 뻔뻔했다. 

   그래도 그것도 간절한 마음이라고, 하늘에 닿긴 했나보다. 라우 파우 산의 해안가에 도착하는 순간, 드디어 맞게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따듯한 기운을 내뿜으며 하늘을 붉고 노란 빛으로 가득, 가득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내가 찾던, 가득! 벅찼다. 더군다나 이 장소는 일몰을 관람하기에 조건이 최상이었다. 여느 지역과는 달리 고층건물들이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 빌딩은 둘째 치고, 선전으로 이어지는 다리나 갯벌에 떠있는 배를 제외하고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다리와 배도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보다는 장면의 서사를 이루는 오브제처럼 보였다. 

   마침 밀물 직전이라 갯벌을 볼 수 있었다. 사진이 말해주듯 갯벌은 넓고 장엄했다. 태양광은 갯벌을 거울 삼아 하늘 뿐 아니라 땅에서도 빛났다. 갯벌을 밟을 줄은 몰랐다. 그걸 티라도 내듯, 흰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최대한 진흙을 덜 묻히기 위해 공을 들이며 한 발짝 한 발짝 옮겼는데도 신발 리폼이라도 한 마냥 밑창은 모두 갈색이 되었다. 덕분에 여행을 다녀와서 한동안 신발을 보면 갯벌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실 신발 밑창 같은 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순간이 즐거웠다. 좋아하는 친구 안돌과 함께, 현실의 고민은 다 지워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안돌은 태어나서 갯벌을 실제로 처음 본다고 했다. 기억에 오래 남을 순간일텐데,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보이는 모습도 감탄스러웠지만 새삼 홍콩에도 갯벌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금 생각하면 문화적 편견이 가득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소리다. 그렇지만 그때 난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다. 홍콩에 세 달이나 살며 여러 모습을 보았는데도 여전히 홍콩의 주요한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갯벌을 포함해서, 틴 수이 와이 지역을 둘러보고 난 후 홍콩의 다채로운 모습을 전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기대한 것 이상을 보았기 때문에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태양은 처음에는 노랗게 주황빛을 내다가, 아래로 떨어지면서, 마지막을 불태우듯 빨갛게 변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며 밀물도 조금씩 들어왔기 때문에 뒤로 한 발짝 씩 물러나며 태양의 마지막 순간을 감상했다. 직경도 점점 커져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거대해지더니, 일몰의 마지막이 늘 그렇듯 재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해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아서 발길을 돌려 해산물 맛이나 보러 가려고 했다. 근데 하늘이 멋진 걸 한 번 더 보여줄 테니 잠시만 가지마라 붙잡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분홍색 노을을 볼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인생 동안 수백 번 노을을 쫓았지만 분홍빛 하늘을 언제 볼 수 있는지, 그 규칙은 아직도 모르겠다. 무작위다. 해는 날씨가 좋고 나쁘고에 관계 없이 어떤 때는 조용히 퇴장하고, 또 어떤 때는 이 날처럼 분홍빛 보랏빛 여운을 깊게 남기더라. 해에서 반사되는 빛도, 구름도 매분 매초 그 모양을 바꾸어 계속해서 새로운 그림을 볼 수 있었다. 노련한 기수가 몸의 몇 배 크기가 되는 깃발을 하늘 전체에 분홍빛으로 휘두르고 다니는 모양새였다. 원래 사진을 많이 찍지 않는 친구도 이 날만큼은 노을 사진을 많이 찍어 갔다. 


   날이 어두워지자 저 멀리 선전에서 빌딩에 불을 하나 둘 밝혔다. 선전을 가까이서 보았을 때는 기괴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멀리서 보니 야경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인생은 멀리서 볼 때는 희극이고 가까이서 볼 때는 비극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들어차는 바닷물을 피해 제방에 서서 풍경을 보는 중에, 현지인 분과의 추억을 하나 쌓을 수 있었다. 친구와 함께 일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었다. 누구에게 부탁할까 고민하는 중에 고급 카메라를 둘러 멘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그 정도 장비를 가졌다면 틀림없이 사진을 잘 찍어주실 것 같았다. 조심스레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수락하셨다. 돌려 받은 스마트폰에는 역시나, 걸작이 담겨 있었다. 친구와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시고, 본인도 사진 부탁을 받은 사실에 기분이 좋아하시며 유쾌한 분위기를 마구 풍기셨다. 참 감사했다. 

   하늘에 검은 빛이 드리우고, 선전의 빌딩에도 불빛이 거의 다 들어왔을 때 바다에 진짜로 안녕을 고하고 수산물 시장으로 돌아왔다. 그냥 느낌이 좋은 곳에 가서 가리비, 게, 전복 등을 맛보는 느낌으로 조금씩만 시켰다. 가격대가 꽤나 나갔기 때문에 먹고 싶은대로 다 시키면 거덜날 판이었다. 가리비와 전복은 한국에는 없는 스타일의 양념이 곁들여졌기 때문에 특이했고, 맛있게 먹었다. 게는 찜으로 주문했는데, 내가 아는 그 맛이었다.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해산물이라 나한테는 이 식사가 강렬하게 남지는 않았고, 오랜만에 먹어 반가운 정도였다. 그런데 안돌은 가리비와 전복을 이날 난생 처음 먹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너무나도 좋아했다. 다행이라면 수산물 시장의 냄새를 힘들어했는데도 해산물을 맛있게 먹었기 때문이고, 불행이라면 가격이 비싸서 많이 먹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요즘도 안돌과 이야기하다가 홍콩 이야기가 나오면, 안돌은 이 해산물이 정말 맛있었다는 얘기를 항상 한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때는 바로 택시를 타지 않고 시골길의 정취를 느끼면서 조금 걸었다. 끝까지 걷기엔 조금 멀어 택시를 잡았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별 일은 없었다. 밤중에 기어이 근처의 맥도날드에 가서 야식을 먹고 체했던 것만 빼면 말이다.

   일박 이일 여행 치고 활발하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기록할 내용이 상당히 많다. 익숙하지 않은 뉴 테리토리즈 지역에 가서, 틴 수이 와이 지역을 살펴보며 내가 인식하는 홍콩의 크기가 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틴 수이 와이에서 보고 느꼈던 하나하나가 내가 아는 홍콩이라는 범위 안에 새롭게 추가되어,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홍콩은 우리가 영화나 매체를 통해 아는 모습 이상으로, 그야말로 다양한 유산을 가진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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