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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공 Oct 11. 2021

사자라 불리는 산

홍콩에서 머문지 일흔여덟 번째 날

도심에서 시작하는 등산

   홍콩에 있는 동안 등산을 총 네 번 갔다. 더 많이 가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부족한 체력 탓이 가장 컸다. 걷는 체력은 많이 늘었지만 오르막길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등산을 하면 보통 다음날 낮까지는 근육통에 앓아 누웠기 때문에 한 번 등산 가려면 총 1박 2일을 비워야 했는데, 일상의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기 쉽지 않았다. 또 마음 먹으면 바로 떠날 수 있을 만큼 등산 능력이 대단치 않았다. 인생 첫 등산이 홍콩에 도착한지 두 주만에 멋모르고 무작정 빅토리아 피크에 오른 것이니, 완전히 초보였다. 친구와 함께 가면 믿을 구석이라도 생겨 그나마 나았다. 그렇지만 함께 할 친구를 찾을 수 없을 때는 어떤 트레일로 가야할지 검색하다가 혹시나 산 속에서 미아가 될까 지레 겁을 먹고 조금 더 쉬운 여행지로 눈을 돌린 적도 몇 번 있다. 


   라이언 락 등산은 즉흥적으로 떠나게 되었다. 햇볕이 오랜만에 따사로워 야외 활동을 하기에 괜찮았다. 안돌이라는 친구와 쑨 완으로 일박 일일 여행을 다녀온 바로 다음 날이라 여독이 조금 남아있기도 했지만 이런 날에 등산을 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래서 안돌에게 함께 가기로 점 찍어둔 장소인 라이언 락에 즉흥적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라이언 락도 등산 후반부는 가팔라 쉽지 않다고 알려져 있지만, 안돌이 본인이 이끌어주면 내가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말해주어 안심했다. 안돌은 하루에 열 시간 이상 트래킹한 적도 있는 등산 고수다. 등산에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오후 세 시 즈음 집을 떠났다. 등산 가기에 시간이 조금 늦은 감이 있나 싶었지만 오히려 정상이나 하산길에 노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수많은 등산로 중 타이 와이 역 근처에서 출발하는 길로 택했다. 홍험 역에서 하늘색 노선 지하철을 타고 십 분만에 타이 와이 역에 도착했다. 등산을 하면 산을 타는 과정이 주가 되기는 하지만 전후로 무엇을 보고 먹었는지도 추억의 일부로 남는다. 역에서 등산로 입구까지는 도보로 이십 분 정도면 금방 가지만 도시의 생김새를 구경하며 걷는 재미가 있었다. 각 지역마다 독특한 건물들이 한 두 개씩은 꼭 있고 그런 건물들이 그 지역의 주요한 특징이 되어 기억하기 쉬워진다. 어떤 세븐 일레븐 매장은 도토리 꼭지 같은 지붕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아파트는 흰 바탕에 빨간 포인트가 들어가 있어 주변 건물들이 무난한 데에 비해 튀었다. 등산로 입구 근처에는 산 속 깊은 곳에 어울리는 집이 몇 채 보였는데, 근방은 너무 도시적이라 이질적이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분명 날이 좋아 놀러 나왔는데 도심 속에서 가림막도 없는 길을 걸으니 쪄지듯이 더웠고, 등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땀이 비오듯 났다. 휴대폰의 날씨 어플에는 분명 기온이 이십오 도라고 되어 있었는데 체감으로는 삼십 도였던 게 이 년이 지난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이 난다. 습도 때문에 겨울을 제외하면 홍콩에서 체감온도는 기온에 오 도 정도를 더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걸 이 날 확실하게 깨달았다.  

타이 와이 역 앞에서

지붕이 도토리 꼭지 같은 세븐일레븐 건물

붉은 색 포인트가 인상적인 건물

산에 점점 가까워지는 중


   약간 헤맨 끝에 등산로의 입구를 찾았다. 어떤 등산로들의 입구는 그 곳이 입구라는 것을 티도 내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라이언 락 등산로 입구는 표식이 꽤나 확실하다. 이 곳에 일단 들어서면 낙장불입이라고 말하듯 말이다. 


   등산 초반에는 길이 대부분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어 어렵지 않았다. 안돌은 전에 등산을 함께 했을 때처럼 내가 가능한 덜 지치도록 페이스 조절을 도와주려 했다. 빨리 가다가 중간에 쉬는 것 보다는 차라리 매우 천천히 걸으며 쉬지 않는 편이 낫다고 충고하며 말이다. 그런데 나는 초반에 어느 정도 오를만 해서 그 충고를 무시하고 힘차게 걸었다. 일부러 천천히 걷는 것도 힘들다고 속으로 핑계를 대며 말이다. 오랜만에 등산을 하니 쓰지 않던 근육들이 동원되어 운동하는 기분이 꽤나 났다. 엉덩이를 들어 걸을 때마다 복근이 자극을 받아 탄탄해지는 기분이 들어 신나서 짹짹댔다. 배에 힘을 주고 안돌에게 만져보라며 말이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랬다. 나중에 어떤 비극을 불러올 지도 모르고 말이다. 

   라이언 락 국립공원은 거주지에 꽤나 밀접해있다. 등산로가 좀 더 자연에 파묻힌 경우에는 작정하고 등산을 나와 운동복과 가방, 장비 등을 갖춰 입은 사람이 많은 반면, 이 곳은 동네 마실 나온 느낌으로 등산하는 현지인이 많았다. 특히나 현지인 할아버지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길이 익숙해서 그런지 힘도 크게 들이지 않고 가뿐가뿐, 휘적휘적 잘도 다니셨다. 홍콩에 있으면서 광둥 할배들의 특징을 몇 가지 파악했는데, 난닝구를 입고(때로는 배가 보이게 돌돌 말아올리고) 족히 몇십 년 된 것 같은 카세트를 몸에 지니며 노래를 크게 틀기도 하신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항상 무표정이다. 이 할배 법칙은 라이언 락에서도 적용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마카오에도 적용이 된다는 걸 후에 직접 확인하고 왔다. 


    우거진 숲속을 걷다 보니 산에 들어오기 전보다 시원해졌지만, 도심에 있을 때보다 나아진 것이지 아주 나아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최소한 기분은 시원해졌다. 홍콩에서는 날이 조금이라도 따듯해지면 온 몸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내 살갗에 24시간 찰싹 들러 붙어있다. 땀방울인지 공기 중의 수분이 맺히는 건지 구분조차 하기 어렵다. 갈증이 쉽게 나 물을 아껴 마셔가며 올랐다. 


   등산을 하며 가장 기다리게 되는 것은 아름다운 경치이다. 등산하는 동안 도시의 모습이 수풀 뒤로 숨다가 빼꼼 나타나다를 반복하며 감질맛이 나게 했다.


  그러다 어떤 지점에서 처음으로 탁 트인 경치를 맞이했다. 건물들은 외관이 대개 일정한 양식을 따랐기 때문에 꽤나 규칙적이었다. 마치 3D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설계한 것처럼 말이다. 등산로의 중간에서부터 멋진 장면을 감상할 수 있었으니 정상의 뷰에 대해 더욱 기대하게 되었다. 

  카오룽의 동쪽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는데, 해안선에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땅이 특히 눈에 띄었다. 바로 홍콩 국제 공항이 란터우로 이전하기 전에 있던 카이 탁 지역이다. 당시에 이착륙하는 영상을 보면 위험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비행기가 주변의 건물 가까이 날아 아찔하다. 버스를 타고 근처를 지나갈 때 이 지역을 보며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끝내 가지 못했다. 과거 활주로로 사용되던 길의 한쪽 끝에는 작은 공원도 있는데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분명 풍경을 감상하기 좋을 것이다. 다음 번 홍콩에 갈 때는 가볼 수 있기를 바란다. 


   십오 분 정도만에 다시 탁 트인 경치를 마주했다. 산을 조금 더 올랐을 뿐인데 풍경 속 건물들의 크기가 훨씬 작아졌다. 카오룽 서쪽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나 카오룽 역의 ICC(International Commerce Centre)이다. ICC 근처의 건물들도 가까이서 보면 입 벌어지게 높지만 백 층이 넘는 ICC 옆에서는 모두 꼬꼬마가 되어버린다. 쑨 완에서 보았던 ‘스톤커터즈 대교’도 보였다. 


   정상에서 바라 본 경치가 이 정도였다고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산행이었을테지만 진짜 ‘꼭대기’라고 불리는 곳까지는 조금 더 남았었다. 고지를 앞두고 체력에도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안돌이 가방을 대신 들어주었는데도 힘들었다. 혼자서는 절대로 안전하게 오르지 못했을 거다. 그렇지만 피곤함을 느낄 새도 없이, 다치지 않도록 한 걸음 한 걸음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마지막은 특히나 가파르고 길이 깔끔히 정돈되어 있지 않아 거칠은 바위들을 밟고 올라야했다. 


마침내, 진짜 꼭대기!

   라이언 락은 고도가 495m이다. 등산에 대해서는 무지렁이라 그런 숫자들에 대한 감도 없고, 등산 소요 시간도 신경쓰지 않고 친구 하나 믿고 무작정 갔기 때문에, 끝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 같다. 시작하기 전에 얼마나 힘든지 알면 시작하지 않을 일들이 많다.

   내가 밟은 곳은 말 그대로 정식 명칭이 '라이언 락 정상’인 지점이었다. 라이언 락의 한문 표기를 그대로 읽으면 사자산이 된다. 산이 사자의 앉은 모습을 닮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등산 중에 산의 모습을 그려둔 비석이 몇 개 있었던 것을 보면 사자의 형상이 현지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모양이었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사자를 닮은 것이 산의 전체 모습인지 혹은 산 정상 근처의 암석인지 잘 모르겠고, 어느 쪽이라 하더라도 정말 사자를 닮았는지 알아보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거칠은 황갈색 바위들을 딛어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 사자산이라는 명칭이 산과 왜인지 모르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홍콩 지도를 펼쳐놓고 라이언 락을 찾으면 국토의 중심부에 놓여 있다. 그러니 말 그대로 홍콩의 중심에 높이 올라 홍콩을 내려다 본 것이다. 정상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카오룽의 동쪽 또는 서쪽 등 한 방향으로만 볼 수 있었다면 정상의 경치는 삼백육십 도로 트여 있었다. 남쪽으로는 카오룽에 건물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고 그 너머에는 바다가, 더 너머의 홍콩 섬까지 보였다. 동쪽을 보면 라이언 락에서 마온산 국립공원 방향으로 산맥이 거대하게 이어지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시야를 북쪽으로 조금만 틀면 뉴 테리토리즈 지역과 너머의 바다가 보였다. 서쪽을 바라보면 겹겹이 겹친 산맥 위로 그 날의 태양이 조금씩 지고 있었다. 짧은 시간 새에 머리와 마음에 모두 담을 수 없었다. 여유를 충분히 가지고 산 위에서 부는 바람을 맞으며 땀도 식히고 자연의 소리도 들으며 눈 앞의 것들을 감상했다. 한 시간 반 정도의 고된 운동에 대한 대가로 엔돌핀과 도파민이 몸 속을 활개칠 때 지도에서 기호로만 봐왔던 해안선과 땅의 생김새를 두 눈으로 훑는 기분은 짜릿하다. 확실하게 비일상적인 순간이다. 

말 그대로 발 아래에 홍콩

초점은 조금 잃었지만 구름이 멋지다


   날이 흐려 풍경을 볼 때 선명도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보일 것은 모두 보였다. 생각해보면 등산을 할 때마다 날이 흐렸다. 홍콩에는 그만큼 흐린 날이 많다. 그렇지만 매번 느끼듯 흐리면 흐린 대로 그림이 되었다.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석양이 막 지기 시작했었다. 커다란 산맥들이 앞뒤로 여럿 겹쳐 있는데 산맥과 나 사이에는 안개와 햇빛이 각각 다른 두께만큼 존재했기 때문에, 겹겹의 산맥들이 모두 다른 농도를 지니고 있었다. 수묵화를 그릴 때 멀리 보이는 산은 먹에 물을 많이 섞어 그리고 가까이 있는 것을 그릴 때는 진한 먹으로 그리는 것처럼 말이다. 동양화 한 폭이 그렇게 그려져서 내 눈 앞에 실제로 펼쳐져 있었다. 산맥의 곡선, 구름의 모양, 해가 떠있는 위치, 해의 크기 등 모든 구성 요소가 짜여진 것 같았다. 사진에도 멋지게 담아졌다. 

   흐린 날씨와 석양의 빛은 노을 사진 뿐만 아니라 도시 사진을 찍을 때도 도움이 되었다. 도심의 빌딩 정글에도 어둠이 조금씩 깔리는데 서쪽 방향에서만 노을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한 건물 안에서 명암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을 먼 곳에서 관조하고 있으니 나는 잠시나마 속세와는 상관 없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곧 다시 돌아가야하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쾌감이 감정의 주를 이루긴 했지만 거기에는 체념의 감정도 조금 섞여 있었다. 도심의 풍경을 감상할 때 항상 하는 생각이다. 

산의 코앞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고층 아파트들

어디를 찍어도 빽빽하다


   풍경을 충분히 감상하고, 다른 등산객들과 사진을 서로 찍어주기도 한 후 하산길에 올랐다. 하산은 등산만큼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을 해도 단단히 했었다. 하산의 기억은 고통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기력은 빠졌고 다리는 다리대로 아픈데 그 중에서도 복근이 가장 아팠다. 아래로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복근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등산을 완주했다는 뿌듯한 마음 정도로는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등산을 오랜만에 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산을 오르며 배에 복근이 생긴 것 같다고 배에 자꾸 힘을 주고 만져보며 깝죽댄 탓이었다. 내가 힘들어하니까 안돌은 본인에게 업히지 않겠냐 했지만 부담을 주기 싫었다. 길도 거친데 나를 업으면 손을 못 쓰고 두 다리로만 무게를 지탱해야하고 그러다 삐끗이라도 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까 걱정도 되었다. 징징대기 싫어서 최대한 꾹 참으며 내려오다가 많이 힘들어서 안돌에게 딱 한 마디 했다. "안돌아 나 지금 정말 울고 싶어." 그런데 안돌은 기대한 바와 다르게 반응했다. "어차피 안 울거 알아." 매정한 답변에 나오려던 불평도 쏙 들어갔고 속으로만 엉엉 울면서 하산했다. 

   다행히 완전하게 어두워지기 전에 하산을 마칠 수 있었다. 등산로가 끝나자마자 절 하나가 눈에 크게 띄었다. 외벽이 크고 노랗게 나있는 데다가 가파른 지형을 완벽하게 활용(?)했기 때문이다. 타이 와이 역 근처를 비롯하여 라이언 락 근처에 유명한 절이 여럿 있는데 아마 산의 정기를 받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해가 자취를 모두 감추자 도심에 불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산 아래에서 본 도심의 야경도 꽤나 괜찮으니 산 정상에서 야경을 봐도 아름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글 지도에서 실제로 깜깜한 밤에 라이언 락 정상에 올라 사진을 찍어 올린 사람이 있는데 야경이 환상적이다. 밤 산행은 위험하기 때문에 산의 지리에 꽤 밝은 사람일거라고 생각이 든다. 구글 지도에 'Lion Rock Peak'의 리뷰를 검색하면 해당 사진을 볼 수 있다. 


잘 먹어야 등산도 잘 마무리하지

   애초에 산의 남쪽으로 빠져나오겠다는 정도는 계획하고 있었지만 그게 정확히 어디가 될 줄은 몰랐다. 등산로를 빠져나오면 버스나 지하철 정류장이 근처에 하나는 있겠지 싶었고, 그게 쿤 통 선의 웡 타이 신 역이 되었다. 초록색 노선인 쿤 통 선을 타고 몇 정거장 가면 집에 가까운 왐포아 역으로 갈 수 있어 경로가 괜찮았다. 그렇지만 그 지하철 경로 사이에는 팀호완이 있다. 등산에 지쳐 배가 주렸으니 들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 팀호완은 삼 수이 포 지점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 따지면 프린스 에드워드 역에 조금 더 가깝다. 배가 많이 고파서 가는 길에 눈에 띄는 식당 간판들을 보며 이것도, 저것도 맛있겠다는 말을 반복했더니 안돌이 "네 마음을 그렇게 자주 바꿀 수는 없는거야."라고 한 마디 했다. 안돌은 하루 동안 다정하면서도 매정했다. 

   세 시간 가까이 먹은 것 없이 등산했으니 굶주린 동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식당에 가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이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먹고 싶은 수준을 넘어 몸이 음식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날 내가 음식 사진을 남겼다는 사실이 놀랍다. 팀호완에서는 항상 먹기 바빠 사진을 찍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딤섬을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팀호완은 등산한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딱 좋은 선택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안돌에게 하산할 때 울고 싶다고 한 것이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진심이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돌은 등산을 하다 힘들 때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쉬는 게 아니라 우는 거냐고 반문했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렇다. 울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조금 쉬어가자고 이야기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 고통이 빨리 끝났으면 해서 휴식을 취하는 방법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안돌의 말을 들으니 내 자신이 조금 우스워서 머쓱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등산은 왜 할까>라는 곡이 있다. 가사가 재미있다. 산에 올랐다가 어차피 내려올 것인데 뭐하러 힘들게 고생을 하고, 술도 어차피 마셨다가 깨는데 뭐하러 속 버려가며 마시냐고 한다. 결국에 전달하고 싶은 바는 연인이 있다가 없으면 애초에 없었던 것보다 더욱 쓸쓸하기만 하니 그냥 혼자이고 싶다는 거다. 

   비록 하산이 힘들기는 했지만 힘든 것보다는 얻은 것이 더 많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힘든 부분은 기억 속에서 쉬이 미화되고 우리는 또 좋은 자극을 쫓으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장기하 씨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힘들 줄 알면서 등산을 할 것이고, 속을 버릴 것을 알면서 술도 마실 것이고, 싸울 걸 알면서 연애도 할 거다. 홍콩에 있는 동안, 좋은 것을 보고 싶은 욕심은 넘치는데 근육은 아직 부실하니 등산은 매번 힘들었다. 그렇지만 하면 할수록 등산이 더 좋아졌다. 라이언 락을 완주하고 어느 정도의 난이도를 깨부수었으니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더 어려운 곳도 가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런데 아쉽게도 라이언 락이 홍콩에서의 마지막 등산이었다. 홍콩에 다시 갈 때는 못 가본 국립공원 중에 한 곳이라도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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