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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공 Oct 11. 2021

소가 주인인 해변을 본 적 있나요?

홍콩에서 머문지 백 하고도 스물세 번째 날

이제야 가는 란터우 섬

   5월의 날 좋은 날. 란터우 섬에서 일주일 같은 하루를 보내고 왔다. 란터우 섬은 홍콩에 다녀온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도 모르게 들렸을 곳이다. 홍콩에 간 적이 있다면 뭘 타고 갔는지 생각해보자. 홍콩 국제공항이 바로 란터우 안의 섬인 첵 랍 콕 섬에 위치해 있다. 또 디즈니랜드에 다녀오지 않았는지 생각해보자. 디즈니랜드 또한 란터우 섬 내에 있다. 

   그렇다고 보통 공항이나 디즈니랜드에 다녀와서 '란터우 섬 여행 다녀왔다'고 하지는 않는다. 란터우 섬에 놀러 갔다 왔다 하면 십중팔구는 섬 내 랜드마크인 티안 탄 부처상을 보고왔거나 타이 오 어촌에 다녀온 거다. 또는 중년 분들의 디스커버리 베이 골프 여행일 수도 있겠다. 티안 탄 부처상은 홍콩 여행 명소 톱 10 같은 리스트에 웬만하면 들어있다. 타이 오 어촌은 톱 20 정도에 속한다. 그런데 홍콩 현지 친구들에게 '참 잘 싸돌아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던 내가 백 일 넘게 제대로 된 란터우 여행을 한 번도 안 했다니! 자존심이 상할 뻔했지만 다행히 귀국 전에 란터우에 계시는 부처님을 뵙고 올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홍험 역에서 출발했고, 안돌과 함께였다. 지하철로 퉁충 역까지 갔다. 퉁충 역에서 조금만 걸으면 옹핑 360 케이블카 승강장이 나온다. 부처님을 뵈러 가려면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지만, 풍경 그리고 속도 모두 케이블카가 좀 더 낫겠다 싶었다. 역에서 승강장으로 이동하는 그 잠깐이 쪄질 듯 더웠다. 안돌은 유독 더위를 잘 타서 케이블 카 승강장 옆에 있는 꽤 큰 수영장에 당장 빠지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도 초기값인 더위를 제외하고는 여행하기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홍콩의 오월에는 덥지 않은 날이 없기 때문이다. 


이건 그냥 케이블카가 아니야

   조금 기다려 티켓을 사고 케이블카에 올랐다. 탑승시간은 이십 오 분이다. 무려 이십 오 분. 그렇지만 지루할 새 없었다. 케이블카 밖에서 사방의 풍경들이 자기를 봐야한다며 주장하고 난리를 쳤다. 

   란터우 섬은 바다 위에 떠있는 커다란 산맥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여러 산봉우리들로 구성되어 있다. 안돌은 란터우 등산을 몇 번 다녀왔었는데, 난이도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케이블카 안에서 그런 날 것의 자연을 내려다볼 수 있다. 
 


   산맥들은 끝없이 겹쳐지고 그리고 그를 둘러싸는 바다는 탁 트여있다. 자연의 원 투 펀치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면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그 높이에는 거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홍콩의 다른 지역에도 고층 빌딩이 많지만 란터우 섬의 아파트는 기본이 최소 오십 층은 되어 보였다. 산맥들이 아파트의 배경이 되기 때문에 그리 높아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파트가 주변의 건물을 얼마나 작아보이게 만드는지 생각하면 실감이 난다.

   자연이 언제나 최고라지만 인공물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연파인가 도시파인가 혼란스러운데, 뭐. 좋은 게 좋은 거다. 


   홍콩에서 지내는 동안 단 하루도 건물의 외관에 경이로워하지 않은 날이 없다. 미적인 관점에서만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우선 벌집처럼 규칙적이고 촘촘해서 시각적으로 안정적이다. (거주하는 입장에서 좋은 것인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홍콩의 주거 방식에는 문제점이 많다.) 두 번째, 색감이 다양해 보는 재미가 있다. 세 번째, 규모가 압도적이다. 네 번째, 자연 속에 건물이 들어선 경우가 많은데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잘 어우러진다. 다양한 색감이 자연과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도와준 것 같다. 

   ‘바다다!', ‘산이 정말 많다!', '우와, 아파트 봐!' 다음엔 '공항 보인다!'라고 외쳤다. 공항을 품은 첵 랍 콕 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섬의 해안선이 깔끔한 게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첵 랍 콕 섬과 란터우 본섬을 연결하는 두 개의 다리도 잘 보였다. 


   케이블카에서 소들을 볼 수 있었다. 케이블카 때문에 설치한 인공 구조물 아래에서 햇빛을 피하며, 안방 마냥 편히 쉬고 있었다. 란터우 섬을 소들의 섬으로 불러도 되겠다 생각할 만큼, 이 날 소를 많이 봤다. 


   어느 시점에서부터 산등성이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도 볼 수 있었다. 이 날 케이블카를 교통수단 삼기 위해 탔을 뿐이고 기대를 크게 하지 않았다. 케이블카는 여느 관광지의 전형적인 관광 상품이고, 어릴 때부터 여러 번 타봤기 때문에 이름만 들어도 조금 지루한 감이 있다. 그렇지만 란터우 섬의 옹핑 케이블카에서는 넓은 란터우 섬을 한 눈에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비행기 창문에서 보는 경치 못지 않았다. 산맥의 정상보다 높게 올라갔기 때문에 산꼭대기를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발 밑에 오로지 녹빛 수풀만이 펼쳐져 있을 때, 자연에 파묻힌 듯이 기분이 좋았다. 옹핑 케이블카가 홍콩 명소 추천 목록에서 좀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해도 되겠다 생각했다. 


   부처님이 점점 크게 보였다. 케이블 카에서 내릴 때가 됐다는 뜻이었다. 내리자마자 기념품 가게를 지나가게 되어있었다. 케이블 카에서 가득 채운 기대감이 소비로 이어질 수 있는 적절한 기회이다. 그렇지만 딱히 살 것은 없었고, 햇빛이 강렬해 선글라스나 하나 사려다 참았다. 


   부처님을 좀 더 가까이서 보려면 옹핑 마을을 지나야 했다. 옹핑 마을은 식당과 각종 가게들을 전통적인 건물 양식으로 지어져 모여 있는 아기자기한 마을이다. 재미있게도 스타벅스도 기와지붕을 달고 있었다.


   어르신들이 많이 오는 관광지답게, 온갖 좋은 말들을 적어놓은 북들을 볼 수 있었다. 건강, 행복, 부, 아름다움 등 말이다. 마음에 드는 단어 옆에 서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내가 고른 단어는 'Peace'이다. 안돌은 영어가 모국어인데 'Auspiciousness'라는 단어를 처음 본다고 해서 놀랐다. 나는 수능 공부할 때 'auspicious, 상서로운' 이렇게 달달 외웠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도 모르는 단어를 내가 알다니. 우하하. 한국 교육과정의 비실용성이 빛을 발했다. 안돌은 귀엽게도 단어의 뜻은 몰라도 마음에 든다며 'Auspiciousness'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할아버지 오래오래 'Health'를 유지하시길 빕니다. (멋들어진 나무를 찍으려는 데 앵글에 걸리셨다. 그렇지만 보내드리고 싶을 정도로 잘 찍히셨다.)


부처님을 뵈러

   옹핑 마을에서 밥도 한 끼 사먹고 부처님을 뵈러 다시 길을 떠났다. 관광지답게 밥값은 꽤 나가서, 그나마 저렴한 메뉴로 대충 때웠다. 홍콩에서 백 일 넘게 살았으니 저렴한 금액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법을 꿰고 있어서, 관광지 프리미엄에 돈을 지불할 용의가 없었다. 


   햇빛은 뜨거운데 구름은 낮고 풍성하게 깔려 분위기에 상서로움(Auspiciousness)을 더했다. 석가탄신일 당일은 아니었지만 그 근처의 주말이었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부처님을 찾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본토 중국인이 많았다. 란터우 섬은 중국에서 가기 편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퉁충 역에는 중국인 고객을 타겟으로 삼은 쇼핑몰들이 많다.

남천불국(南天佛國).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문으로 추측된다. 찬찬히 뜯어보면 문의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가 정성스럽다.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문을 지나, 드디어 부처님을 마주 보았다. 인파가 어마어마했다. 나도 구름 떼 같은 인파 중 일부가 되어 부처님을 뵈러 올라갔다. 


   케이블카에서 멀리 계신 부처님을 보고,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부처님 앞에 가자마자 그 생각을 취소했다. 케이블카에서는 정말 멀리 있었기 때문이고, 가까이서 보니 압도적이었다. 티엔 탄 불상의 또 다른 이름이 괜히 빅 부다가 아니었다. 크기 뿐 아니라 인물로서 부처가 가진 힘에도 압도당한다. 글을 쓰는 지금도 사진을 보면 당시의 느낌이 떠오르고 숨을 잠시 참게 된다. 권위가 있지만 그렇다고 권위적이지는 않았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 손을 들어 그를 보러 온 사람들을 포용하시는 듯했다. 햇빛 한 줄기가 내려와 분위기를 더했다. 


   부처님을 뵈러 올라 갈 때 꽤 많은 계단을 걸었기 때문에, 나름의 경치가 있었다. 포 린 사원(Po Lin Monastery)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 사찰의 스님들은 매일 이 티엔 탄 부처의 모습을 보며 지내시겠구나 생각했다. 포 린 사원의 내부 전경도 화려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왜 가지 않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비 중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부처님 근처에서 볼 수 있는 풍경 

좋니?

덥니?


지혜의 길

   부처님을 뵈고 주변의 풍경도 구경하고 내려와 지혜의 길을 산책했다. 숲속의 길로,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없어 천천히 걸으며 자연 속에서 여유를 즐기기에 좋았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폐건물들, 예쁜 꽃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거니는 소들이 이 길의 묘미이다. 소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반경에 커다란 동물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다니, 낯설고 조금 무서운 동시에 자연과 가까워지는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길의 중간중간 소를 만지지 말라는 안내 문구에도 불구하고 꼭 만지는 사람들이 있더라. 화가 나는 광경이었다.


   길의 중간중간 폐건물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운영되다 폐점된 매점 같기도 했고, 매우 잘 만든 영화 세트장 같기도 했다. 어떤 사연들을 가진 곳일까. 지혜의 길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예쁜 풀과 꽃들도 있었다. 


그래, 여기가 지혜의 길이다! 멋나는 표지판. 


   SBS 런닝맨 팀도 지혜의 길에서 촬영을 하고 간 적이 있다고 한다. 방송을 보지는 않았지만 지혜의 길이 구불구불하고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라 방송의 콘셉트와 잘 맞았을 듯하다. 출연진은 콘셉트 상 이 곳에서 정신없이 뛰어야 했겠지만 누군가 방문한다고 하면 뛰기보다는 천천히 걸으며 풍경을 음미하기를 추천하고 싶다.

   산책을 마치고 현지 두부 디저트 가게에서 두부 푸딩을 한 사발 했다. 두부 푸딩은 홍콩에서 흔하고 저렴하게 맛 볼 수 있는 디저트다. 별로 달지 않기 때문에 사탕수수 설탕을 뿌려먹기도 한다. 


   홍콩의 택시는 지역에 따라 빨강, 초록, 파랑 세 가지 색의 칠을 입는다. 빨간 택시를 가장 흔히 볼 수 있었다. 빨간 택시는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홍콩 섬과 카오룽 지역을 다니기 때문이고 나는 주로 도심에 있었기 떄문이다. 그래서 빨갛지 않은 택시가 보일 때면 멀리 나와 여행하는 기분이 한껏 났었다. 두부 푸딩을 먹고 버스 정류장에 가는 길에 
란터우에서만 다니는 파란 택시를 만났다. 장난감 같이 귀여웠다. 


소가 주인인 해변을 본 적 있나요?

   섬에 왔으면 바다에 가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란터우 섬은 면적이 꽤 크기 때문에 해안선도 길고 해수욕장도 여럿 있다. 원래 계획은 무이 오(Mui Wo) 페리 선착장 근처의 실버마인 베이(Silvermine Bay) 해수욕장에서 신나게 논 후 페리를 타고 센트럴으로 곧장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혜의 길에서 무이 오 페리 선착장까지가 생각보다 많이 멀었다. 도착할 때 쯤엔 이미 해가 져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 바다도 나쁘지는 않다만 해가 떠있을 때 해수욕을 하는 게 아무래도 낫지. 조금 더 가까운 하 청 사(Lower Cheung Sha) 해수욕장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옹핑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삼십 분 정도 가면 되었다. 티엔 탄 부처상 근처에 있어 그런지 버스 정류장의 규모가 컸다. 정류장 옆에는 공중 화장실이 있었는데 굉장히 크고 신식이었다는 것까지 기억이 난다. 이런 사소한 부분들이 기억이 날 때는 이 년도 더 된 기억들이 어떻게 이렇게 생생할 수 있는지 놀랍다. 버스는 섹 픽 저수지(Shek Pik Reservoir)를 끼는 도로를 달렸다. 한국에도 댐이 관광지인 곳이 많듯, 홍콩에도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갖는 저수지가 많은데, 섹 픽도 그 중 하나였다. 댐과 도로는 물론 인공물이지만 그 배경이 되는 자연은 그대로 보존된 상태였다. 여러 종류의 푸르름이 공존했다. 내려서 구경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란터우 섬은 절대 하루만에 모두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 청 사 해수욕장의 청 사(Cheung Sha)는 한자로 ‘長沙’로 표기하는데, '길 장'에 '모래 사'자를 쓴다. 직역하면 ‘긴 모래’가 되는데, 이름값을 하듯 해수욕장이 좌우로 상당히 길다. 동쪽 서쪽으로 분리하여 서쪽 해수욕장에는 상 청 사(Lower Cheung Sha), 동쪽 해수욕장에는 하 청 사(Lower Cheung Sha)라는 이름이 붙는다. 이곳처럼 홍콩에는 특징에서 따와 이름을 지은 듯한 해변이 여럿 있다. 한 예로 클리어 워터 베이 1 해수욕장(Clear Water Bay First Beach)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이름 그대로 물이 깨끗해서 투명에 가까운 정도였다. 

   버스에 내려 해수욕장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소들의 한 무리가 해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온순하면서도 위엄있게, 해변을 아니 이 섬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선언하듯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지금도 사진을 다시 볼 때마다 놀랍다. 홍콩에는 홍콩 안의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장소가 몇 있었다. 라마 섬처럼 말이다. 하 청 사 해수욕장도 그 중 하나였다. 해수욕장의 입구에는 동남아시아인들이 운영하는 바가 있는데 바닷가 전체의 배경음악이 될 정도로 팝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있었다. 그 바의 존재가 이 곳의 분위기를 크게 결정했다. 서양의 칠을 조금 입힌 동남아시아 같은 게 라마 섬과도 조금 비슷했다. 그렇지만 라마 섬보다는 조금 더 산 속에 파묻힌 느낌이었다. 

   안돌에게 흥분해서 말했다. "내가 와 본 중 가장 힙한 해수욕장이야!"


   바에서는 음식만 팔지 않고 패들보트, 안전 조끼, 사물함 등을 돈을 받고 대여해주기도 했다. 우리는 세 가지 모두 대여했다. 탈의실 및 샤워장은 조금 떨어져 있어 몇 번 왔다갔다 하는 번거로움이 조금 있었다.  

   휴대폰을 사물함 안에 넣고 놀았기 때문에 패들보트를 타는 사진이 없어 아쉽다. 대수는 아니다. 순간을 즐기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사진은 없지만 감각 하나하나는 여전히 생생하다. 나는 태어나서 패들보트에 처음 올라봤고 안돌은 익숙했기 때문에 운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분명 가르친대로 따라했고, 양쪽으로 젓는다고 저었는데 우회전만 해서 제자리만 맴돌았다. 그래서 그냥 안돌이 혼자 운전했다. 항상 고맙다, 안돌. 덕분에 나는 패들보트 위에 누워 하늘과 좌우의 풍경을 보며 신선놀음 할 수 있었다. 바다 위를 침대 삼고 자유로움을 느꼈다. 패들보트와 내 몸은 한 겹이 되어 파도가 칠 때마다 함께 좌우로 두둥실두둥실 움직이며 떠다녔다.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부정적인 요소를 하나 꼽자면, 죽은 잠자리가 바다에 엄청나게 떠다녔다. 유쾌하진 않았지만 하늘이 예쁘고 바다는 넓고 기분은 좋으니 상관 없었다. 

   패들보트를 탈 만큼 타고 나오니 해가 슬슬 지고 있었다. 일몰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은은했다. 


   소님들도 일몰 쪽을 보고 계셨다. 그런 소의 삶, 꽤나 괜찮아 보였다. 


   급하게 떠나기는 아쉬워 밍기적대며 일몰을 천천히 음미하고,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귀가길을 떠났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버스를 내렸던 곳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무이 워 페리 선착장으로 가려는데, 버스가 만석이라 우리가 있는 정류장에 정차하지 않고 가버렸다. 몇 대나 연속으로 그랬다. 석가탄신일 근처의 주말이라 란터우 섬에 놀러온 사람들이 평소에 비해 많았기 때문이다. 도심이 아니라 그런지 콜택시도 잘 잡히지 않았다. 섬의 깡시골에서 이렇게 날밤을 샐 수는 없는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택시가 어쩌다 한 대씩 지나갔고, 우리는 정류장에서 꽤나 오래 기다렸기에 택시를 기다리는 긴 대기줄 중에서 그나마 앞쪽에 속해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택시를 잡은 한 현지인 커플이, 우리에게 동승하지 않겠냐고 제안해서 네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제가 어떻게 거절을. 냉큼 얻어탔다. 원래 우리의 목적지는 퉁충 역이 아니었지만 그 커플이 퉁충 역으로 간다길래 그냥 거기로 갔다. 어찌됐든 지하철역이 있는 곳으로만 가면 미아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 


팀호완은 언제나 하루를 마무리짓는 좋은 방법이야

   고마운 커플과 택시 비용을 나누어 내고 퉁충 역에서 요깃거리를 찾았다. 물놀이를 하고 나면 진이 빠져 더 배고프다. 그러나 구미를 당기는 식당이 없어 우선 동네로 돌아가기로 했다. 퉁충 선 MTR에 올랐는데, 기가 막힌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퉁충 선은 팀호완 지점이 있는 올림픽 역을 지난다. 안돌에게 내 계획을 설명했고, 안돌은 가보지 않은 팀호완 지점에 가는 것을 조금 찝찝해하기는 했지만 동의했다. 

   팀호완은 지점마다 맛 차이가 있었다. 내가 홍콩을 다녀온지 반 년 정도 후인 2019년 말 서울 삼성동에도 팀호완 매장이 한국 최초로 생겼는데, 주요 메뉴들의 맛이 현지와 거의 비슷해서 감탄했다(가격은 안 비슷하다). 최근엔 잠실점과 용산점도 오픈했는데, 나는 삼성점만 가봤지만 지인의 말에 의하면 지점마다 맛이 조금 다르다고 한다. 홍콩의 팀호완도 마찬가지였다. 지점마다 맛과 가격이 조금씩 다르고, 같은 지점도 날마다 맛의 컨디션이 달랐다. 올림픽 역의 팀호완은 인테리어부터 삼 수이 포에 위치한 본점과 달랐다. 삼 수이 포의 팀호완은 비위생적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아주 정갈하고 깔끔하다고도 말하기는 어렵다. 때로는 너무 때 빼고 광낸 곳보다는 을지로에 정감이 넘치는, 아주머니들이 많이 계시는 식당처럼 팀호완도 그런 점이 매력이었다. 팀호완 본점은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불친절한 것이 큰 특징인데(불만이라기보단 맛집의 하나의 요소로 여겼다), 올림픽 역 근처의 팀호완은 간판부터 때깔이 다르고 내부도 더 깨끗하며 직원들도 친절했다. 신식 쇼핑몰 안에 위치해있어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안돌도 나도 맛은 왠지 덜 좋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편견이었다. 무진장 맛있었다. 이 지점이 본점보다 좀 더 비싸다는 사실을 고려해도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팀호완이 하루 동안 소비한 에너지를 채우기는 부족했는지,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휴식을 취하다 늦은 밤에 한 끼를 더 해결했다. 계란 간장밥에 엄마가 한국에서 보내준 장아찌를 비벼먹었다. 선전 여행을 하고 돌아와 남은 음식으로 때웠던 한 끼처럼, 빈약하지만 마음은 풍족하게 채우는 한 그릇이었다. 소화를 시키고 하 청 사 해수욕장의 파도가 몸에 남긴 잔상을 침대 위에서 느끼며 잠들었다. 놀이공원에 다녀온 날 침대에 누울 때 몸이 간질간질한 것처럼 말이다. 


   케이블 카를 타고 티엔 탄 불상을 보러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미리 계획하지 않았었다. 여러 즉흥적인 선택들이 좋은 결과를 낳은 하루였다. 하나의 행복한 감정 덩어리로 기억되는 날이고, 그 덩어리를 조각조각 뜯어 세심히 살펴 글로 풀어냈으니 다시 큰 덩어리로 뭉쳐 마음 깊이 보관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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