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 머문 지 나흘째
홍콩에 막 도착한 나는 갓 태어난 아기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예상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닥친 적응과 생존이라는 목표 하에 문제점이 발견되면 하나씩 풀어나가기 바빴다. 하루하루를 채우는 것이 온전히 내 몫이었다. 계획이 있어도 수가 틀리는 게 해외생활인데,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계획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눈에 띄는 것들부터 해치우며 일상을 채워나갔다. 지금도 즉흥적이고 감정적이지만 그때는 그런 성향이 더욱 강했다. 아기는 궁금한 것은 일단 입에 넣고 본다. 나도 홍콩을 그렇게 배워나갔다.
나흘 째면 대강 생활환경을 갖추어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을 때였다. 나들이나 갈까 했다. 그런데 이전에는 여행을 가면 친구들이 하자는 대로 따랐기 때문에 갈 곳을 직접 고르기 어려웠다. 구글에 영어로 홍콩에 구경할 만한 게 뭐가 있는지 검색했더니 한 웹 페이지가 타이 쿤(Tai Kwun)이라는 장소를 추천했고, 거기서는 마침 단 사흘 간만 열리는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이 시기를 놓쳐버리면 그 전시를 볼 수 없으니, 이 핑계로 타이 쿤을 목적지로 정했다. 전시장은 구글 지도에서 후기가 많은 곳이니 무엇이 있든 간에 볼거리가 없진 않겠구나 싶었다.
홍콩에 도착하고 공항을 제외하고는 나흘간 카오룽에만 있다가,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 홍콩 섬으로 가게 되었다. 타이 쿤은 홍콩 섬에서 혹은 홍콩 전체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인 센트럴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MTR(홍콩 지하철)을 이용하여 센트럴 역에서 내리자마자 마주한 이곳의 첫인상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휘황찬란'이다. 홍콩은 길도 좁으며 붐빈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센트럴은 거기에다 빛까지 나더라. 다른 지역보다 매끈하여 빛을 반사시키는 소재로 지어진 건물이 많았다. 역 근처에는 명품을 비롯하여 유명 브랜드 매장들이 자기가 제일 빛나야 한다는 듯이 밝은 조명을 최대치로 켜고 있었다. 어찌나 번쩍번쩍하던지 휴대폰 카메라가 눈앞의 광경을 제대로 담지도 못했다.
버튼을 누르면 '우와' 소리를 내는 인형이라도 된 마냥, 입에서 자꾸만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거리의 밀도에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아 건물을 바라보기만 해도 놀라웠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가 본 중에는 서울이 고층빌딩이 가장 많은 곳이었는데 더 이상 아니었다.
역 근처에서 조금씩 멀어질수록 명품 매장은 덜 보이고 다양한 음식점과 상점, 작은 갤러리 등이 보였다. 그래도 시야에서 고층 빌딩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떤 고층 건물은 피뢰침의 색을 수시로 바꾸었다. 이 건물은 이후에도 센트럴에 갈 때마다 눈에 띄었다. 특히 비 오는 날이면 구름이나 습기가 피뢰침의 빛을 하늘에 흩어놓기 때문에 몽환적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 건물의 이름은 '더 센터'이다. 대단한 피뢰침에 비해 생각보다 이름이 시시껄렁하지만 어찌 보면 그만큼 센트럴 지역에서 대표적인 건물인 것이다.
사실 역에서 타이 쿤까지는 도보로 십 분도 채 걸리지 않지만, 초행길이라 볼거리가 많아 짧은 새가 여행처럼 느껴졌다. 나흘 동안 본 번화가인 침사추이와 센트럴을 비교하자면, 센트럴은 길이 언덕지고 서양적인 분위기가 훨씬 많이 났다. 서울의 번화가에 비하자면 침사추이는 명동이나 홍대에 가깝고, 센트럴은 이태원, 가로수길, 테헤란로를 섞어 놓은 느낌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트렌디하고 화려한 건 모두 모여있다는 거다.
구글 지도는 타이 쿤을 'Tai Kwun - Centre for Heritage and Arts'로 표기한다. 역사적 유산 및 예술 전시관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이곳이 오랜 시간 동안 경찰청 건물로 사용되다가 몇 해 전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했기 때문에 역사적 유산이 공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찰청의 역사를 포함하여 역사적 유산이나 문화예술 관련 전시들이 열린다. 예전에 사용하던 건물을 일부는 그대로 남겨두고 일부는 현대식으로 증축해서, 외관을 보면 구식과 현대식 건물이 이질적으로 공존한다.
방문한 전시의 제목은 <Booked>였다. 전시에 대한 정보를 미리 찾아보지는 않았는데 가서 보니 미술 서적 전시였다. 미술 서적이라는 대주제 하에 관련지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있었다. 일러스트 북, 사진가가 사진을 엮은 책, 그리고 작가의 전시 도록까지 있었다. 책뿐만 아니라 관련한 상품들도 구매할 수 있었다. 엽서,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 필기구, 에코백 등이 있었다. 최근 몇 년 간 한국에서도 독립서점이 하나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데, 그런 곳을 전시로 크게 확장시켜놓은 듯했다.
아이디어를 담은 플랫폼만 '책'으로 통일되어 있고, 그 안에는 온갖 주제가 담겨있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작품을 접했다.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 등 온라인 플랫폼의 발달로 내가 원하는 예술에 어떻게든 닿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알고리즘은 결국 내가 흥미 있어하는 것들에서 한 다리 정도만 이어진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Booked> 전시에는 각국에서 온 작가들이 주제 제한 없이 만든 작품들을 모아두었기 때문에, 기존에 내 관심사는 아니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작품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전시장에서 찍은 여러 작품의 사진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저작권 침해의 소지가 있어 싣지 않으려 한다.
이전까지는 주로 단일 주제 전시를 많이 보러 다녔는데 유독 홍콩에 있는 동안은 종합 전시들을 많이 관람했다. 이후에 간 아트 바젤, 에이치 퀸즈(H Queen's) 갤러리, PMQ 등에서도 말이다. 홍콩은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동서양의 허브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세계 유명 패션 디자이너 백 인의 삶을 총망라한 책이 있었다. 패션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영국 패션 대학원으로 유학을 준비하는 친구가 생각나서 한국에 돌아가면 선물하려고 한 권 구매했다. 책을 구매하고 에코백을 사은품으로 받았는데, 튼튼하고 예뻐서 이 년도 더 지난 요즘도 항상 들고 다닌다. 엽서도 몇 장 구매했다. 이외에도 매력적인 상품이 많았는데 충동구매라고 생각해서 사지 않았다. 당시에 쓴 일기를 보니 사지 않은 것을 집에 와서 후회하고 있더라.
전시장에는 테라스도 있어 바깥 센트럴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건물들은 블록을 촘촘하게 쌓아 올려 만든 것 같이 생겼고 나는 그 사이에 둘러싸였다. 홍콩에 온 지 닷새만에 거의 다 밀도가 높지만 센트럴은 그중에서도 극악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배웠다.
어떤 공간은 스물네 시간 닫혀있다는 재미있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내부를 을지로에나 있을 법한 요즘 감성의 좌식 바(bar)처럼 멋지게 꾸며두고 뭔가를 진행 중이었는데 그 뭔가가 무엇인지를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DJ가 앞에 있으면서 멜론 팝송 탑 200에 들 것 같은 신나는 노래들을 틀며 중간중간 멘트도 넣는데 사람들은 학술 포럼에 온 마냥 진지하게 듣고 있는 거다. 분위기가 이상해서 나는 거기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나 혼란스러웠던 기분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알고 보니 음악 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간중간 노래를 틀어주는 중이었다. 진지한 이야기는 딱딱한 장소에서 해야 한다는 편견을 깨는 것 같았다.
전시 공간의 한 구석에서 눈에 띄는 책 두 권을 발견했다. 한 권의 표지에는 질문을 남기라고, 다른 권의 표지에는 답변을 남기라고 적혀 있었다. 전시에 다녀간 누구나 작성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나 항상 궁금하기 때문에 흥미롭게 보았다(광둥어를 못해 영어만 읽었지만). 자신의 거취를 상담하기도 하고, 왜 자신은 거지 같은 남자만 만나냐며 한풀이도 하며, 예술가답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기도 한다. 아마도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은 대개 예술을 사랑할 터, 질문에 센스가 가득했다.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Why so nice?(왜 그렇게 잘났습니까?)'라는 질문 옆에는 왜 한 페이지를 다 쓰냐며 귀엽게 항의를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항의할 때도 질문 형식을 지키는 것마저 귀여웠다. 나는 답변 책에 'I was born nice(태어날 때부터 잘났었습니다.)'라는 답변을 남겼다. 당시 내 자존감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지만 예술 작품들에게 좋은 기운을 받고 신이 많이 났던 모양이다.
타이 쿤 근처의 피잣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는 침 사 추이로 넘어가 그 유명한 야경을 처음으로 보러 갔다. 센트럴과 침 사 추이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데, 우리가 홍콩의 야경이라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 장면은 센트럴의 빌딩 숲이 내뿜는 빛을 침 사 추이에서 본 것이다.
하루 종일 안개가 심하게 껴 빛이 번졌다. 그럼에도 바다 건너의 빛들은 충분히 감동을 주었다. 서울의 야경도 멋지지만 센트럴의 빌딩들에 칭칭 감긴 빛과 대형 간판은 차원이 다르다. 나이를 약간 더 먹은 지금 다시 본다면 불빛에 새겨진 기업명이 다 자본의 힘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그냥 아름답게 보였다. 하나의 작품을 보듯 풍경 전반을 감상하다가, 아는 브랜드가 보이면 괜스레 아는 척해보고, 한국 브랜드가 보이면 반가워했다. 이 야경은 단 한 번도 카메라에 실물만큼 멋지게 담긴 적이 없었고 그걸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에 항상 눈을 통해 마음에 담으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그 모습을 잊을세라 자꾸 카메라를 들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층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층 버스의 맨 앞자리에 타면 도시의 풍경을 넓은 시야로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침사추이의 강렬한 네온사인을 비롯하여 도시의 모습을 눈에 익히려 노력했다.
이후에도 센트럴에 몇 번 더 방문했고 갈 때마다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다. 그렇지만 홍콩에서 보낸 네댓 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를 꼽을 때 센트럴이 먼저 떠오르지는 않는다. 센트럴은 동서양 양쪽이 모두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공존하여 매력이 철철 넘치는 지역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단지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정도 이상으로 역동적이고 자극적이었다. 센트럴 안에 있을 때보다 바다 건너 침 사 추이에서 외부인으로서,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받아들일 때 센트럴을 가장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