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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공 Oct 11. 2021

몇 년 만에 만난 친구와 산에 오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홍콩에 머문 지 마흔 번째 날

간식을 사고 설레는 마음으로, 오랜 친구를 만나러!

   지금 홍콩에 가면 자가격리를 무려 삼 주나 해야 한다. 그렇지만 코로나 전에 홍콩은 한국인들이 주말을 끼고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정도의 여행지였다. 그래서 그런지 소셜 미디어에서 '홍콩에 가면 꼭 먹어야 할 음식 10' 같은 추천 리스트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작성자에 따라 구성이 조금씩 바뀌지만 타이청 베이커리의 에그타르트는 항상 있었다. 

   센트럴의 타이청 베이커리 앞을 지나갈 때면, 한국인들이 유독 줄 서서 구매를 기다리고 있다. 센트럴은 워낙 다양한 국적의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 한국인들만 모여있으면 그 모습이 확연하게 눈에 띈다. 그렇게 줄 서서 사 먹는 타이청 에그타르트를 내가 살던 홍험이라는 동네에서는 줄 서지 않고 사 먹을 수 있었다. 가격도 조금 더 저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것이 여행자가 아닌 오래 머무는 자의 특권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친구를 만나 익청빌딩과 드래곤스 백에 가기로 한 날, 동네에서 타이청 에그타르트를 사 갔고 쿼리 베이 역에서 만나자마자 나눠먹었다. 


   친구를 '도리'라 칭하겠다. 도리는 십 대 때 친구였는데 스무 살 이후로는 거의 보지 못했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셜 미디어에 홍콩에 갔다는 사실을 올리자 도리가 홍콩에서 가까운 중국의 선전에 있다며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날짜를 정한 것이 이 날이었다. 드래곤스 백에서 등산을 하기로 했다. 쿼리 베이 역에서 도리를 기다리며 몇 년 만에 만나는데 머쓱하고 어색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도리가 나타나자마자 "야, 여기 왜 이렇게 머냐?" 하며 땀을 닦았을 때 걱정은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유쾌하고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익청빌딩

   드래곤스 백으로 가는 방향에 익청빌딩 근처를 지나기 때문에 그 김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홍콩에는 사진 명소로 소문난 빌딩이 둘 있다. 하나는 초이 홍 아파트로, 무지개 빌딩으로 유명하다. 다른 하나는 익청빌딩이다. 전형적인 홍콩 아파트의 외관을 가지며, 외벽은 습기에 얼룩져 홍콩의 우중충하고 어두운 멋을 잘 보여준다. 이런 건물은 다른 지역에도 얼마든지 많지만 건물의 구조가 'ㄷ'자 형이라 입체적인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에 특히나 유명해진 듯하다.

   직접 가서 동네를 둘러보니, 정말 사진만 찍으러 가는 곳이었다. 빌딩 자체의 용도는 모르겠으나 외관상으로는 아파트 같았다. 우리나라 북촌 한옥마을의 실제 주민들이 사는 집 앞에서 사진 찍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근처에 관광을 목적으로 갈만한 곳은 정말 없다. 익청빌딩이 유명해지면서 그 주변에도 뭐가 생길 법한데도 말이다. 근방은 그냥 주거지역으로, 홍콩의 사람 살아가는 동네는 이런 느낌이구나 살피기에는 좋았다. 나는 그런 곳을 살피기 좋아해서 쿼리 베이 역 근처가 흥미롭게 느껴졌지만, 내가 시간이 촉박한 관광객이었다면 익청빌딩에서 사진만 찍고 갈 것이다. 그렇지만 굳이 이 근처에서 뭔가 즐기고 싶다면, 쿼리 베이에서 한 정거장만 가면 노스 포인트 지역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미슐랭 딤섬 식당인 팀호완의 지점도 있고, 노스 포인트에서 홍험으로 가는 페리에서는 날씨를 불문하고 장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익청빌딩 입구의 그라피티


   건물을 배경으로 도리와 사진을 찍었다. 이곳에 사람 자체가 많지 않았는데 우연히도 한국 사람을 만나서 서로 찍어주기도 했다. 그 사람이 우리를 찍어주고 나서 너무 잘 찍었다고 말하길래 기대를 많이 했지만 나중에 결과물을 보니 엉망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분을 원망한 것은 아니고 허무맹랑해서 웃긴 기억이다. 


들이는 힘에 비해 경치가 좋은 산행, 드래곤스 백

   사진만 몇 장 찍으면 되니 오래 머물 필요가 없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드래곤스 백으로 향했다. 지하철로 차이완 역까지 갔고 거기서부터는 버스로 환승하여 등산로의 중간 정도까지 올라갔다. 도리와 나는 등산으로 힘을 너무 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중간부터 걷고 싶었다. 

   날이 흐렸다. 등산 중에 춥거나 비가 올까 우려했지만 다행히 걷기에 나쁘지 않았다. 기온도 적당했고 흐린 날도 흐린 대로 괜찮았다. 이전에는 흐린 날은 곧 우울한 감성에 연결된다고 생각했었지만, 홍콩이 그 공식을 깨 주었다. 홍콩의 흐린 날은 운치 있어 맑은 날보다 다양한 정서를 느끼게 한다. 특히나 페리를 탈 때 흐린 날의 미묘한 재미를 느꼈다.  

   이미 어느 정도 높이가 있는 지점에서 등산을 시작했기 때문에 곧 멋진 풍경들을 볼 수 있었다. 안개가 많이 꼈지만 오히려 상서로운 기운을 만들어냈다. 많은 나라들이 홍콩보다 멋들어진 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산, 바다, 때로는 빽빽한 건물들까지 이 세 가지를 한눈에 모두 담을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귀여운 용 그림


   앞서 말했듯 나도 도리도 많이 걸을 생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버스를 내린 곳에서 이십 여 분만 걸어 올라가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구글 지도가 내 위치 정보를 잘못 인식하고 길을 알려준 듯했다. 한 시간이 경과했을 때도 우리는 계속 걷고 있었다. 도리와 나 둘 다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 만났는데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되었지만, 동시에 생각보다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있었던 중 굵직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도리와 내가 같이 아는 친구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또 도리는 나보다 해외생활을 오래 하고 있었기에 내가 타지 생활을 시작해가며 얻은 고민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주었다.

   당시에는 해외에 있어서 여행이 일상의 큰 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지만, 몇 년 만에 친구를 만나 같이 산행을 떠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해보니 꽤나 괜찮았다. 보통은 카페나 술집에서 무언가든 한 잔 마시며 회포를 풀지만 맑은 공기를 마시고 산길을 헤매면서도 오래 묵은 이야기보따리를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더라. 


   이십 분 걸릴 줄 알았던 것이 결국 두 시간이 되었지만, 어쨌든 끝은 있다. 정상에는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불었다. 당시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머리가 우스꽝스럽게 흩날린다. 바다는 역동적으로 움직였고 그 에너지를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사진에 그 에너지를 모두 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파도의 굵은 결, 해안가에 파도가 세게 부딪쳐 만들어낸 하얀 거품, 그리고 휴대폰을 놓칠세라 꼭 잡느라 구도에 들어와 버린 내 손가락이 조금이나마 증명한다. 사실 드래곤스 백은 등산로라기보다는 산책로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높지도 않고, 홍콩에서 할 수 있는 산행 중 가장 쉬운 편에 속한다. 그렇게 높지 않다는 뜻이지만 그럼에도 산과 바다의 경치가 꽤나 좋다. 어찌 보면 가성비가 좋은 산행이겠다.  


   정상을 즐길 만큼 즐기고 하산을 시작했다. 초록색이 시야를 가득 채웠고 안개는 여전히 자욱했다.  

내려가자


흐린 날의 깊고 짙은 섹오 비치

   드래곤스 백까지 와서 산보만 하고 집에 가면 조금 아쉽다. 코 앞에 꽤 괜찮은 해변이 두 군데나 있다. 하나는 섹오 비치, 하나는 빅 웨이브 베이다. 안타깝게도 빅 웨이브 베이는 홍콩에 머무는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가본 친구들은 모두 정말 좋다고 했던 곳이다. 이 날 도리와는 조금 더 인지도가 높은 섹오 비치를 가기로 했다. 정상에서 어느 정도 걸어 내려와서 섹오 비치 앞까지 데려다주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중에도 창 밖으로 경치를 계속 볼 수 있었다. 

   섹오 비치는 전반적으로 색감이 독특했다. 산맥이 끼고 있는 해수욕장이라 그런지 바위가 많았는데, 바위 색이 황갈색과 진회색 그 사이 어디쯤에 속해 있었다. 비에 젖어 그랬을 수도 있지만 모래색도 진했으며, 바다도 깊은 남청 빛을 뗬다. 한국의 해수욕장들과는 전반적으로 색감이 달랐다. 날씨가 우중충하다면 우중충했지만, 모래는 좌우로 탁 트여있고 바다는 앞뒤로 끝없이 펼쳐져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게 해 주었다. 


   용기를 내어 해수욕장의 좌우 끝에 위치한, 작은 바위산에도 올라 보았다. 조금씩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해변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도까지 도달했다. 생각보다 멀리 간 모양이었다. 


   사진만 보면 조용하게 바다를 관조한 사람이 찍은 것 같지만, 사실은 온몸으로 바다를 만끽하고 왔다.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무릎 이하로는 모두 젖었기 때문에 해변 앞 구멍가게에서 바가지 가격에 양말도 한 켤레 새로 샀다. 다이아몬드 힐에서 산 재킷을 보면 난 리안 공원이 떠오르듯 아직도 이 양말을 보면 섹오 비치가 떠오른다. 


   도리는 침 사 추이에서 버스를 타고 선전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몇 시간 동안 힘은 잔뜩 뺐고 몇 시간을 걸었는데 먹은 것은 에그타르트 밖에 없었다. 그러니 둘 다 저녁을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었다. 수제 버거를 먹을까 하다가 한국식 치킨이나 먹으러 가기로 했다. 

   구글 지도에서 섹오 비치에서 침 사 추이까지 가는 경로를 검색했다. 지하철을 타는 경로 여럿과 버스만으로 가는 경로 하나가 나왔다. 버스로 가는 경로가 시간은 오래 걸린다고 했지만 실제로 버스는 더 빨리 가고, 도보 거리가 가장 적다는 점을 고려해 버스를 타기로 했다. 홍콩의 버스 기사와 택시 기사들은 상당히 거칠게 달리기 때문에 가능한 바이다.

   버스 안에서 멋진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사진을 찍었는데 우연히도 홍콩의 대표 명소들이 상당히 많이 담겼다. 완차이의 컨벤션 센터, 센트럴의 IFC몰을 비롯하여 야경의 주인공이 되는 건물들, 침사추이의 가장 높은 빌딩들도 모두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홍콩의 또 다른 상징인 배들도 보인다. 작은 배들의 돛대가 여럿 모여 있는 모습, 그리고 형형색색의 배가 모여있는 모습이 조금 투박하기도 하다. 홍콩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 사진이 된다. 투박함과 세련됨이, 빽빽한 도시와 여유로운 자연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 홍콩이다. 
  


홍콩 번화가에서 만난 한식집의 모습

   침 사 추이의 동쪽에서 버스를 하차하여 '이가 치킨'이라는 가게로 갔다. 현재도 영업 중인지 궁금해서 검색했는데 영업 중이라 반가웠다. 홍콩에 있었던지 이 년이 지났으니 당시에 갔던 가게들 중 없어진 곳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한글로도 간판이 달려있는 것을 보고 사장님이 한국인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가게 내부로 들어갔더니 그 느낌엔 확신이 생겼다. 


   자리를 잡으면 치킨무와 채 썬 양배추 샐러드부터 주시는 것이 영락없는 한국 치킨집이다. 한국에서 글을 쓰는 지금이야 놀랍지 않은 일이지만 난생처음으로 한 달 넘게 해외 살이를 하고 있던 한국인은 이 두 반찬만으로 심하게 감동을 받았다. 별거 아니지만 익숙하고 그리운 맛에 거의 울먹이며 먹었다. 우습게도 그다음 날에 나는 한국에 며칠 다녀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하루만 참으면 한국 땅에서 진짜 한국 치킨을 맛볼 수 있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반찬뿐만 아니라 가게의 내부도 사장님이 한국인이라고 추측하게 만들었다. 한국 대학가의 오래된, 나무 테이블들이 있는 호프집 같은 인테리어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십 대인 내 기준에서는 그런 인테리어가 오래된 술집이지만, 이삼십 년 위 세대들에게는 젊은 시절의 향수일 것이다. 사장님이 이모 삼촌 뻘 정도 되는 분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주류 포스터도 한국 스타일이었다. 치킨무와 양배추 샐러드에 감동했듯이 영어와 번체 중국어로 가득한 홍콩에서 한글을 사용한 포스터를 보면 한국인들은 반갑고 들뜰 수밖에 없다. 헐렁한 한국말로 적힌 포스터를 보고 도리와 한참 웃었다. 쏘맥 세트의 가격이 128원이라고 적혀있는데, 당시 1 홍콩 달러가 백오십 원가량이었으니 19200원 정도 되겠다. 참고로 홍콩은 술집에서 먹는 술은 물론 비싸지만, 편의점에서 파는 술은 한국에 비하면 공짜나 다름없다. 맥주 한 캔을 한국 돈으로 천 원가량이면 구입할 수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리와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가게에 한국인 고객의 주문 전화가 걸려왔는데 때마침 가게에 한국어를 구사하는 종업원이 없는 상황이어서, 종업원이 손님인 도리에게 주문 전화를 받아달라는 해프닝도 있었다. 마침내 치킨이 나왔을 때 눈앞의 음식에 몰입하여 흡입하듯 식사했다. 치킨의 생김새와 맛 모두 완전히 한국 스타일이었다. 타지 생활을 한지 한 달이 넘어 처음 먹어보는 제대로 된 한국식 치킨인데 등산까지 하고 왔으니 맛이 없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도리는 선전으로 돌아갔다. 두 주 정도가 지나고 나는 도리를 만나러 선전에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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