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공 Oct 11. 2021

이상한 나라의 난 리안 가든

홍콩에 머문 지 서른한 번째 날

   이 날 홍콩에서 가장 혼잡한 장소 그리고 가장 조용한 장소에 모두 다녀왔다. 양 극단을 오간 셈이다. 


홍콩을 깊게 우려내면, 몽콕 그리고 삼수이포

   케이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케이는 홍콩에서 나와 같은 처지의 외국인이었다. 그렇지만 나와 달리 몇 년 지냈기에 홍콩에 대해 작게 또 크게 아는 바가 많아 도움 되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하루는 케이와 밥을 먹기로 했다. 장소는 몽콕 근처의 유명한 딤섬집으로 정했다. 

   식당에 막상 도착했더니 메뉴도 느낌도 미리 찾아본 바와 조금 달랐다. 첫 방문인 나뿐 아니라 케이도 예전에 비해 뭔가 변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유명한 맛집에 가봤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가보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뭐하게 됐다. 맛은 까무러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맛있게 잘 먹을 정도였다. 식사를 마치고 케이가 몽콕과 삼 수이 포 지역 일대를 구경시켜주었다. 

   카오룽의 서쪽에는 침 사 추이, 조던, 야우 마 데이, 몽콕, 삼 수이 포 등 번화가가 많다. 지하에서는 MTR이, 지상에서는 그 유명한 나단 로드(Nathan Road)가 이 지역들을 순서대로 관통한다. 엄밀히 하자면 삼 수이 포는 나단 로드에서 벗어나 있지만 확실히 나머지 번화가와 맥을 같이 이룬다. 나단 로드는 홍콩의 거리라고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처럼 생겼다. 물론 다른 많은 거리도 비슷한 모습을 가지지만, 번화가를 가로지르는 위치 때문에 나단 로드가 특히나 유명하다. 남쪽에서부터 한 군데씩 짚으며 올라가 보자. 침 사 추이는 홍콩의 명동 정도이며 여기에 현지스러움을 가미하면 조던이다. 조던이 젊고 세련되면 야우 마 데이이다. 몽콕은 야우 마 데이와 이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좀 더 어두우며 날 것의 느낌이 있고, 그 거친 느낌을 극대화하면 삼 수이 포가 된다. 

   이 날은 비도 마침 와서 거리가 우중충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친구 없이 혼자 탐방했다면 무서울 것까지는 없더라도 긴장은 했을 거다. 분위기는 어둡지만, 사람들이 그 안을 밀도 높게 채우며 내뿜는 에너지가 생동감을 주어 지역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케이는 나를 삼 수이 포의 전자 상가에 꼭 데려가고 싶어 했다. 가는 길에 나단 로드보다 조금 안쪽 골목에 위치한 몽콕의 펫숍 거리를 지났다. 펫숍들이 거리를 빼곡히 메웠고 그 안에서는 온갖 동물들을 팔고 있었다. 이 거리를 지나며 여러 번 충격을 받았다. 우선 당연하게도 동물들에게는 환경이 열악하여 바람직하지 않았다.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이미 몽콕의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리고 고양이와 강아지가 말도 안 되게 비쌌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들었던 펫숍 분양가보다 수 배 비쌌다. (물론 가격을 떠나 펫숍은 근절되어야 한다.) 또 동물의 가짓수에 놀랐다. 가둬 놓고 팔 수 있는 모든 동물이 있었다. 고양이, 강아지는 물론이고 토끼, 파충류, 물고기 등 말이다. 비닐봉지에 물고기를 담아놓고 전시하듯 팔고 있었는데, 산소가 제대로 전달이 될지 궁금했다. 종류도 금붕어 정도에 그치지 않고 각종 열대어들이 많았다. 남겨둔 사진이 없는 것을 보면, 정신이 없어 찍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사진을 금지했던 것 같기도 하다. 

펫숍 거리를 거쳐 삼 수이 포로 가는 길, 프린스 에드워드 역 근처


   몽콕만 해도 붐비는데 삼 수이 포는 더욱 정신이 없었다. 침 사 추이나 몽콕에도 낡은 건물들이 많지만 삼 수이 포에는 더욱 많다. 동네가 낙후되어 오히려 네온사인 간판은 더 많이 남아있는 듯 보였다. 최근에는 네온사인이 효율성 문제로 LED로 대체되는 중이기 때문이다. LED 간판은 네온사인처럼 멋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운 일이다. 삼 수이 포에는 범죄 영화의 배경이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비 오는 날에 가서 더 그랬을 거다. 매음 영업을 하는 곳도 많은데, 직선 모양의 네온사인이 가로로 짧게 걸려 붉은색을 띠고 있는 것이 그 표식이다. 친구는 매춘부가 본인을 홍보하기 위해 신체 사이즈를 간판에 적어 걸기도 한다고 알려주었다. 


   삼 수이 포의 전자 상가는 케이가 강력 추천했지만 크게 흥미롭지 않았다. 딱히 살 것도 없었고 아무리 대단한 장비들을 봐도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도 몰랐다. 그나마 흥미를 끈 것은 컴퓨터 본체가 투명할 수도 있고, 그 안에서 불빛이 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현지 분위기를 파악하는 건 언제나 재미있다. 당시보다 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삼 수이 포에서는 저렴한 유심칩을 많이 판매한다. 그것도 모르고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침사추이의 1010이라는 통신사 대리점에 들어가서 아주 비싼 돈을 주고 6개월 계약을 맺었다. 나쁘지 않은 가격이라 생각했었는데, 삼 수이 포의 유심칩을 생각하면 헛돈을 많이 쓴 셈이었다.

   역 근처의 쉐어티(Sharetea)에서 타피오카 펄이 들어간 흑당 우유를 하나 사 먹고 케이와 헤어졌다. 이 날 이후로 팀호완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삼 수이 포에 간 적이 없다. 딱히 가고 싶었던 적이 없다. 그렇지만 어떤 친구는 삼 수이 포의 분위기를 너무나 좋아해서 그냥 그 분위기를 느끼러 가기도 했다. 홍콩의 맛이 그리운 지금에서야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홍콩이 한 잔의 차라면 그 차를 몇 시간을 우려 티백의 씁쓸한 맛까지 우려낸 게 삼 수이 포라고 할 수 있겠다. 현지 홍콩을 농도를 진하게 즐기고 싶다면, 삼 수이 포로 가면 된다. 


이상한 나라의 난 리안 가든

   이제 홀로 여행할 차례였다. 며칠 전에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보고는 점찍어둔 장소가 있었다. 사진 속에는 이층 팔각정이 있었는데 외벽은 금빛에, 앞에는 연못이 있고 그 위에는 주황색 다리가 놓여 있었다. 주변의 수풀과도 잘 어우러졌다. 내 머릿속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은 보통 색도 짙고 어딘가 엄숙한 구석이 있었는데 그곳은 알록달록 색감이 넘쳐났다. 밝은 에너지에 매혹되어 꼭 실제로 보겠노라 다짐했었다. 

   MTR을 타고 다이아몬드 힐 역에서 하차했다. 플라자 할리우드라는 꽤 커다란 쇼핑몰이 역과 연결되어 있었다. 역이나 쇼핑몰이나 이름이 번쩍번쩍하다고 생각했다. 난 리안 가든은 역에서 꽤 가까이에 있었다. 가는 동안 짧은 새지만 근방이 주거 지역이며 다른 곳에 비해 외국인의 비율이 현저히 낮다는 걸 알아차렸다.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나와 주민들 서로에게 명백했다. 특히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저런 사람이 여기 왜 있나 싶은 표정으로 나를 보셨다. 이곳에서 그런 시선을 처음으로 강하게 느꼈고 이후 다른 곳들 특히 주거 지역에서 종종 느낄 수 있었다. 

   난 리안 가든을 개방된 공원처럼 생각하여 개장 및 폐장 시간이 존재할 줄도 몰랐는데 막상 가보니 있었다. 일부는 닫혀 있었지만 다행히도 전체적으로는 개방되어 있었다. 팔각정 건축물만 기대하고 갔지만 정원이 생각보다 넓었다. 거대하다 할 정도는 아니지만 절대 한눈에 담을 수는 없는 규모였다. 
 


   여느 곳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홍콩에서는 어딜 가나 사람이 없었던 적이 없다. 난 리안 가든은 집에 혼자 있을 때보다 더 고요했다. 산책 나온 주민들을 간혹 볼 수 있었지만 주로 혼자 또는 둘이 와서 조용히 관람했기 때문에 분위기를 바꾸지는 않았다. 어찌나 적막하던지 비가 땅을 때리는 소리까지 하나하나 들릴 정도였다. 허풍 같지만 당시 찍은 동영상에서도 그 소리가 들린다. 조명이 필요한 최소한만큼만 켜져 있어 적막함을 한 층 더했다. 어둡고 비도 오는데 충분히 밝지 않아 주변을 잘 보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좋았다. 

   홍콩의 다른 지역과만 다른 게 아니었다. 이곳의 낮과도 확연히 달랐다. 물론 난 리안 가든의 낮은 내가 두 눈으로 보지는 못하고 사진으로만 접했지만, 밝은 느낌이 가득하여 새소리와 어느 중년 여성 관광객의 웃음소리와 어울릴 것 같았다. 그렇지만 두 눈으로 확인한 모습은 그 정반대였다. 고요하고도 신비스러운 힘이 나를 삼켜 내가 사라진다 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이곳에 가는 동안 어두울 때 도착하면 팔각정이 잘 보일까 걱정했다. 혹시나 그렇다 하더라도 얼추 분위기만 느끼고 오자는 마음으로 갔는데, 웬걸! 조명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이층 팔각정을 밝히고 있었다. 낮 때와 같이, 어쩌면 명암이 더해져서 더욱더 아름다운 황금빛으로 말이다. 동양화에서 튀어나온 마냥 생긴 소나무가 팔각정 근처를 둘렀다. 작은 연못은 화룡점정 격으로 팔각정을 둘러쌌다. 눈을 떼기 어려웠다. 사극의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고 비가 싸아- 내리는 소리만 들렸고, 그 속에서 우산을 들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우산 쓴 토토로처럼.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감상했다. 필요한 시간이었다. 홍콩에 온 이후로 잘 적응해가며 지내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비어있는, 자극적이지 않은 그런 공간을 무의식적으로 갈망했었다. 한 달 정도 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흡수했기 때문에 조금 내려놓고 정리할 공간이 필요했다. 


   오래전에 건축되어 보수 공사를 거쳐 다듬어졌다기에는 약간 인위적인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치밀하게 짜인 듯 조화가 완벽했다. 팔각정 자체는 그렇다 쳐도 그 주변에 소나무가 배치되어 있는 형태나, 둘러싼 연못이 마치 팔각정을 위해 존재하는 듯 말이다. 그런 면이 감상에 훼방을 놓지는 않았다. 재미있게도 이 팔각정의 명칭에는 '완벽'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구글 지도 상 영어 명칭은 'Pavilion of Absolute Perfection'이다.) 애초에 설계를 할 때부터 완벽하게 조화롭게 하기 위해 기를 쓴 걸까. 역사가 궁금해져서 표지판을 읽어 봤더니 홍콩 정부와 치 린 사원이 합작해서 2000년대에 당나라 양식으로 지은 공간이었다. 

   난 리안 가든에는 팔각정 이외에도 볼거리가 많았다. 꽤 넓은 공간을 가진 전통 양식의 건물이, 또 다른 커다란 연못을 끼고 있었다. 풍류를 즐기기에 딱 좋아 보이는 게 경주의 안압지를 연상시켰다. 입구에서 작은 폭포를 하나 봤었는데 안쪽에는 커다란 폭포가 하나 더 있었다. 폭포수는 빗물 때문에 더욱 세차게 흘렀고 녹빛 조명이 그 물에 기묘한 분위기를 입혔다. 폭포 옆의 건물 속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연회장에 온 것처럼 앉아 있었다. 바깥에는 사람이 없어 쥐 죽은듯한데 그 안에만 사람들이 연회를 하듯 앉아있는 걸 보니 마녀들의 회담을 훔쳐보는 마냥 기분이 이상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비건 식당이라더라.  


   이 정도면 둘러볼 것은 모두 둘러본 셈이었다. 그런데도 공간을 떠나기가 힘들었다. 정말이지 사람을 묘하게 끌어당겼다. 어둑어둑하지만 완전히 암흑은 아닌 하늘 아래에서, 이 공간과, 내가 적막함을 갈망했던 마음과,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내리는 비와, 기묘한 조명이 한 데 모여 생긴 데서 온 힘이었다. 이곳의 나무들도 특별한 힘이 깃든 것 같은 아주 괜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남겨 온 사진들을 보니 그게 완전히 기분 탓은 아니었다. 가지가 뻗어나가는 모양새가 평범하지는 않다. 


   폐장 직전까지 공간을 즐길 수 있는 대로 즐기다가 나왔다. 낮 시간대에 꼭 다시 찾아야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결국엔 그러지 못했다. 홍콩에서 다시 오겠다고 마음먹고 못 간 곳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도 홍콩에서 혼자 있고 싶거나 조용한 장소가 그리울 때는 항상 난 리안 가든을 떠올렸다. 

   근처에는 치 린 불교 사원이 있었다. 어떤 곳인지 입구까지는 가보았지만 물론 늦은 밤이라 닫혀 있었다. 다시 역으로 돌아와 플라자 할리우드 쇼핑몰을 구경했다. 다음 날 등산을 갈 예정이었는데 비가 온다는 예보를 보고 방수 재킷도 하나 구매했다. 급하게 필요해서 산 게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야장천 입는 옷이 되었다. 무심코 입고 다니다가 가끔씩 옷에서 다이아몬드 힐과 난 리안 가든의 추억이 불쑥 튀어나오고는 한다. 

이전 02화 '베이'자 돌림 여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