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후 사흘 째 되던 날 뇌막염을 진단받은 아들
30여 년 전 자녀 둘을 낳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셋째를 낳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리스크인 것 같았다. 더군다나 딸을 둘 낳은 후 셋째를 낳는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제왕절개로 세 명을 출산하는 것은 무모하리만큼 용기 있는 선택이었고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 생각했었다. 세 자녀의 부모가 되는 것에 부담을 갖는 것은 지금처럼 경제적 이유가 한몫했으며 사회적 분위기와 다른 길을 가는 특별한 선택이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아들 선호 사상이 우리의 삶의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내 느낌으로는 '딸 둘을 낳는 것이 딸 셋을 낳는 것보다 현명하게 보였다. 장남과 결혼한 나는 적어도 아들 하나는 낳아야 된다는 무언의 압박을 느꼈거나 스스로도 아들 선호가 뼛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어쨌든 딸 둘을 연이어 낳은 나는 죄라도 지은 것처럼 자신감이 없었고 셋째에 대한 부담감과 기대감의 양가감정으로 마음속 저변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가끔씩 셋째를 낳는다면 반드시 아들이어야 된다는 부담감이 올라왔고 그래서 아예 셋째를 낳지 않을 계획이라고 말하며 주변의 입을 막고 있었다. 아들 없는 결손이 딸 셋 엄마라 불리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고 그것이 오히려 편해질 것만 같았다. 주변에 딸 셋을 데리고 다니는 가정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까지 맘대로 느끼곤 했다. 더군다나 나는 세 자매 중 둘째였는데 언니와 여동생이 딸만 둘을 낳았었다. 유전적 요인으로도 아들을 낳을 확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에게 찾아온 셋째 임신 소식은 온몸을 굳게 만들었다. '또 딸이면 어쩌지?' 생각만 해도 무섭고 떨리고 앞이 깜깜해지는 일이었다. ‘차라리 낳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머리가 아프고 복잡한 힘든 날들을 보냈다. 세 번째 제왕절개 수술이라는 부담감보다는 아들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열 달을 긴장과 불안 속에서 지낸 날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아들을 주시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나의 일부가 되어갔다.
셋째는 전신마취가 아닌 부분마취를 해서 아이를 낳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긴장을 했던지 정신이 맑아져서 수술과정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벌벌 떨면서 무섭다고 그만 잠들게 해달라고 호소를 했고 수술에서 깨어나 보니 남편이 아들이라고 말하며 좋아했다. ‘나도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앞서며 스스로가 대견해졌고 감격의 눈물이 나왔다. 나는 세상을 얻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가장 행복했고 아무것도 부럽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었다. 그런 기분은 정말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제왕절개로 회복 시간이 필요했다. 사흘 후에야 아들을 보러 갔다. 아들은 피부가 하얗고 이목구비가 또렷했고 건강하게 세상에 나와 주었다. 내가 딸을 둘 낳고 셋째로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운동경기에서 우승을 한 것처럼 표현하기 힘든 나만의 자부심이 되었다.
첫 만남의 기쁨으로 수술 회복이 앞당겨지는 듯했다. 두 번째 수유를 하러 갔다. 아이의 몸에서 미열이 느껴졌다. 간호사에게 말했다. “우리 아이에게 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간호사는 아무 일도 아닌 듯 “신생아는 원래 기초체온이 높습니다.”라고 말하며 아이를 받아서 제 자리에 눕혔다. 세 번째 만나러 갔다. 여전히 열이 느껴졌다. 다시 간호사에게 말했다. “우리 아기가 열이 있는 것 같으니 체크해 주세요.”라고 간절히 요청했다. 간호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체온을 쟀다. 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문제는 아니라는 듯 넘어갔다.
밤에 간호사가 찾아왔다. 아이가 열이 높다고 했다. 피검사를 한다는 보고였다. 이튿날 피검사 결과가 나왔다. 열이 오른 원인을 말하는데 정신이 혼몽해지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의사는 ‘뇌막염’이라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을 이을 수가 없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병원 측을 원망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신생아가 무슨 뇌막염을 앓느냐고 따지지도 못했다. 내 모든 것을 앗아간 느낌이었다. 아이는 격리되었고, 나는 의사와 간호사를 붙들고 살려달라고만 간절히 애원했다. 대학병원으로 옮겨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의사는 설명했다. 신생아라서 타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했으며 움직이면서 뇌가 흔들리기 때문에 패혈증으로 인한 위험이 더욱 높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전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의사를 믿어야 했다. 의사를 신뢰하기로 했고 애원했다. "선생님만 믿을게요. 살려만 주세요~" 배를 가른 수술자국이 아물지도 않았는데 아픈 줄도 잊은 채로 참아가며 기도했다.
열흘 후 산모인 나는 퇴원을 했지만 아이는 입원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하루 세 번씩 아이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 차라리 내가 아프기를 바라기도 했다. 간절히 기도했다. 칸막이 너머로 아이를 보았다. 주사를 꽂아야 했기에 앞부분의 머리가 없어진 아이, 태어나자마자 주사 바늘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아이가 웃고 있었다. 점점 나아지는 과정을 통해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다. 생명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선물임을 고백하며 겸손해져야 했다. 3주간의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해도 된다고 했다.
퇴원하기 전 의사는 주의할 점을 일러 주었다. 2개월 후 청력검사를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뇌막염은 치료가 되더라도 합병증을 가져오는 사례가 많은 편이며 가장 흔한 합병증이 청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에 마음은 타들어 갔다.
2개월 후 청력검사를 받았다. 우리 지역에는 영유아 청력검사를 할 병원이 없었다. 아이를 안고 흔들거나 충격을 주면 안 된다는 주의를 들었지만 하는 수 없이 큰 지역으로 갔다. 청력에 이상 신호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이었다. 오빠가 세 살 때 뇌막염으로 청력을 잃어서 농아인으로 살고 있었기에 더욱 실감하는 아픔이었다. 다시 2개월 후 재검사를 받았다. 변화는 없었다. 한쪽은 65% 다른 쪽은 80% 정도의 청력이라고 했다.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은 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6개월에서 1년 주기로 정기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그 쉬운 말에 나는 위로받았고 희망을 꿈꾸었다. 너무나 다행이라고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너무나 간절했던 아들을 낳은 기쁨은 컸다. 그리고 남겨진 아픔은 교만함을 버리게 했다. 우리에게 맡겨 준 귀한 선물을 더욱 소중히 여기라는 울림으로 왔다.
주사 맞기 위해 앞머리가 사라진 모습
2개월 후 앞머리에 맞춰 이발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