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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ow김정숙 Apr 08. 2024

아들과 인생 동반 두 번째 이야기

 생후 7개월 대퇴골 골절의 미스터리

내가 직장맘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친정 부모님 덕분이었다. 우리 부부는 친정집이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아침에 아이를 맡겼다가 퇴근 후 데리고 왔다. 세 아이 모두 우리 부모님이 부양육자가 되어 주셨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정서적 안정감이 보장되었고 우리 부부는 마음 놓고 직장에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양육의 힘듦을 반만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효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60대 부모님의 자유를 빼앗았다. 우리 부모님은 싫은 내색하지 않고 손자들 양육을 당연히 여기며 우리 아이들은 사랑으로 길러주셨다. 당신들의 7남매를 키우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딸의 상황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아이를 키우는 힘든 일을 맡아주셨다. 우리 아이들 셋 모두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부모님이 보살펴 주셨으니 15년가량 도움을 주셨다.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다녀오면 하원차량을 기다려주셨고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의 허기를 달래주셨다. 외출을 하셨다가도 시간에 쫓겨 달려와야겠고 장시간 여행도 힘드셨을 것이다. 천방지축 달려 다니는 애들을 쫓아다니는 것도 힘에 부쳤을 것이다.  

    

딸로서는 죄송한 마음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었다. 마음과는 다르게 때론 부모님의 양육 방법이 못마땅하여 얼굴을 붉히기도 했고, 속상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나 자신의 상황을 원망하고 힘들어한 적도 있었지만, 우리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헌신적 사랑은 손자들에게까지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친정 부모님은 손녀 둘을 키우면서 아들이 있어야 한다고 은연중에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다가 셋째로 아들이 태어나니 그 기쁨이 가장 많이 공감되는 분들이셨다. 더욱 행복하게 아이들을 양육해 주신다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의 자유를 빼앗고 몸을 힘들게 하는 못난 자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노년에 웃음을 주는 큰 효도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염치없이 했다.     


나는 보습학원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아들이 7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기어 다니고 물건을 잡고 서며 겨드랑이를 잡아주면 점프하는 행동을 자주 하는 때였다. 60대 부모님이 힘에 부칠 정도로 아들은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아들은 잘 웃는 아이였고 호기심이나 즐거움을 찾는 아이였다. 잠자고 일어날 때도 웃으며 일어나는 순한 기질을 가진 긍정적인 아이였다.      


학원에서 수업 중에 전화가 왔다.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재웅이 다리에 문제가 생겼나 보다. 세워지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한다. 빨리 와봐야겠다.”라고 하셨다. 수업 중에 갈 수 없다고 말하며 엄마가 어떻게 해 보지 그런 일로 전화를 하느냐고 짜증을 넣어 말했다. 엄마가 예민하게 호들갑을 떠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수업을 하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집에 다녀오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엄마의 목소리를 수화기 속으로 묻어 버렸던 것이다.      


다시 전화가 왔고 엄마는 빨리 와보라고 하시며 울먹이기까지 하셨다. ‘뭔가 일이 생겼구나!’라는 불길한 예감을 안고 정신없이 집으로 갔다. 아이는 울고 있었고 습관처럼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세우려 했으나 더욱 울음소리가 자지러지며 주저앉아버리고 서지 못했다. 내 숨이 멈추는 것 같은 충격이 왔다.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아이를 안고 집을 뛰쳐나왔다.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달렸다. 택시 안에서도 말을 못 하는 아이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 5분 거리의 병원이 길게만 느껴졌고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응급실로 갔다. 엑스레이를 찍었다. 오른쪽 대퇴골이 골절되었다고 했다. 엑스레이 사진을 보니 대퇴골 뼈가 ‘사람  ’처럼 되어 있었다. 부기가 빠져야만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하시며 고정하는 임시 깁스를 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처치를 하고 입원을 했다. 처치를 하는 동안 아이는 많이 울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아이의 아픔을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지듯 아프고 눈물만 나왔다. 말을 못 하는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다가 지쳐서 잠이 든 모습을 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나는 엄마께 취조하듯이 원인을 물었다. 엄마는 어쩌다가 그랬는지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셨다. 갑자기 아이가 울기에 안아주고 세워보려고 하니 서지 못했고 바로 고통스러움을 보이며 주저앉아 버렸다고 그때 상황을 말씀하셨다. 아버지도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계셨다. 잘 돌보지 못한 것이 자신들의 탓이라고 돌리며 미안하다고만 하셨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태어나자마자 뇌막염으로 병원 생활을 하면서 주사기를 달고 견딘 아들에게 또다시 고통을 안겨준 것이 부모님이 아이를 잘못 보살핀 것 때문인 것만 같아서 서운하고 이런 상황을 만든 자신에게 속상했다. 

    

아들은 며칠이 지나서 수술실에 들어갔다 뼈를 맞추는 수술을 했고 전신 깁스를 했다. 행동 조절을 맘대로 할 수 없는 어린 아기라서 배설기관을 제외하고 가슴부터 다리까지 통깁스를 했다. 그 후 한 차례 더 수술을 했다. 두 번씩이나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이를 보는 심정이 괴롭고 아팠다. 병원에서 2개월을 지냈다. 온전하게 뼈가 붙을 때까지 통깁스 생활을 하느라 우리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아이의 무게만큼이나 석고로 된 깁스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기에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아이가 깁스를 하고 있는 동안 걷는 것, 서는 것 안기는 것의 기능을 못하고 발달 지연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힘들기도 했다. 

     

 ‘한번 골절된 부위는 처음보다 더 단단해진다’는 말로 위로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행히도 아이는 깁스를 하고 있으면서도 밝고 행복한 웃음으로 병원의 환자들이나 간호사들에게 해피바이러스를 선사했다. 사람들에게도 통깁스의 어린아이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라서 더욱 흥미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생후 사흘 만에 생긴 뇌막염과 함께 대퇴골 골절 미스터리(이불 위에서 기어 다니다 이불자락에 휘감겨서 골절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 추측이지만 아이가 말을 할 줄 모르니...)로 남겨진 사건이 되었다.

 부모님들은 손자 양육에 대해 부담감이 커졌다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가장 좋은 부양육자가 부모님이라 여기며 이기적인 불효를 이어갔다. 부모님도 손자를 돌보는 기쁨이 노인의 뼈마디가 아픈 고통과 바꿀 수 있는 재미있는 일이라고 하셨고 그때 일을 추억할 때는 가슴 쓸어내리며 이야기하게 되었다.

      

아들은 퇴원 후 재활치료를 거쳐 건강을 되찾았고 골절 부위는 본래의 뼈보다 강해진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조금 뒤처지게 시작된 걸음마를 비롯한 모든 성장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복도식 아파트에서 아들이 나타나면 동네 아이들이 나와서 함께 달리기를 했다. 시끌벅적 떠들어대던 세 살 배기에게 아픈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15년 전 돌아가셨고 엄마는 5년 전 고관절 골절상을 입고 와상환자가 되셔서 딸들의 보살핌을 받고 계신다. 우리 아이들을 보살펴 준 엄마를 지금은 우리가 보살핀다. 우리 아이들 때문에 엄마와 아빠는 서로 다투고 서운했던 일이 많았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엄마가 조금이라도 아이들에게 소홀하면 호통을 치시고 다투셨다. 엄마는 괜히 자신에게 화살이 돌려질 때마다 억울하셨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할 길이 없다. 건강하셔서 마음대로 다니시면 좋을 텐데 누워서 딸들의 눈치를 보는 엄마는 이제 아이가 되셨다. 

어느 날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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