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유아 시절은 호기심이 많았고 웃음이 많았고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가지고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소근육이 발달하면서는 퍼즐 맞추기 놀이를 특별히 좋아했다. 친정아버지는 손자와 시간을 보내기 위한 수단으로 퍼즐 맞추기를 즐겨하셨다.
몇 번 반복하면 금방 맞추는 것에 신기해하며 새것으로 바꿔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돈을 쓰면서도 흐뭇해하셨다.
걷기를 할 때부터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동네 마실을 다니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네 살 정도 되었을 때 되었을 때부터는 가끔씩 시내버스 여행을 하셨다.
종점까지 갔다가 돌아오시곤 했는데 버스 안에서 달리기를 할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았다고 하셨다.
다리 골절 후 더욱 튼튼해진 다리를 갖는다는 말을 증명했다.
친정아버지는 위험한 행동을 제지하느라 기운이 없어지는데도 외손자를 데리고 놀러 다니시는 것이 낙이었다는 것을 먼 훗날까지 추억으로 말씀하는 것을 듣고 알 수 있었다.
친정집 아파트는 복도식이었다. 양쪽 엘리베이터 앞에 계단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만나기만 하면 복도에서 달리기를 했다. 소리 지르며 웃고 떠들고 시끌벅적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한 명도 없고 지나가면 가끔씩 개 짖는 소리만 들린다. 엄마는 지금도 그때 일을 회상하실 때 행복한 미소를 지으신다.
“말도 마라, 재웅이가 집에 오면 자전거를 가지고 복도로 나갔지. 그때는 같은 층에 고만고만한 애들이 여럿 있었어. 세발자전거를 끌고 나가면서 소리를 지르면 이 집 저 집에서 자전거를 끌고 아이들이 나왔단다. 볼만한 광경이었지.
재웅이는 큰 목소리로 호령을 하면서 아이들을 이끌고 다녔단다.
복도는 자전거 경기장처럼 시끄러웠다.
한참을 놀다가 간식 시간에야 불러들일 수 있었단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이 한 명도 없는 것 같다.”라고 손자 이야기를 하실 때 목소리에 신난 음성을 더하였다.
아들이 네 살쯤 되었을 때였다.
친정엄마의 전화 목소리가 또다시 다급했다.
큰일이 났다는 것이다. 무조건 와서 병원에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다.
단숨에 달려와서 보니 아이는 멀쩡했다. 엄마는 대퇴골 골절 때처럼 죄인처럼 말을 꺼내기를 힘들어하고 계셨다.
“재웅이가 복도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엘리베이터 앞 계단 근처에서 회전을 하다가 계단으로 자전거와 함께 굴렀단다.
같이 있던 아이들이 와서 말해주어서 가봤는데 놀란 얼굴을 하고 계단 중간에 멈춰 있더라. 다친 데는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여기며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런데 이를 어쩌냐! 아랫니 네 개가 없어진 거야. 다시 가서 보니 계단에 옥수수알처럼 이빨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피도 안 나고 울지도 않더라.”
엄마의 상황설명에 나는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외상이 없다고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들은 울지는 않았지만 놀란 기색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들의 놀란 반응이 무서움을 더해준 것 같았다.
치과병원으로 갔다. 의사도 황당해하며 유치가 빠지면 새것이 나오니 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빨이 없이 영구치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앞니가 우수수수 빠졌다니 너무 놀랍고 황당함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든 날이었다.
대퇴골 골절은 6개월 정도 지나니 완치가 되었는데 유치가 빠져서 영구치를 기다리는 일은 3년 이상이나 걸리는 일이기에 더 큰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마음을 내려놓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아들의 새로운 이가 빨리 나오기만을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그렇게 아들은 앞니가 없이 3년 이상 유아 시절을 보냈다. 음식을 먹을 때 불편했을 것이고 말을 배울 때도 어려웠을 것이다.
나중에 음성과 언어치료를 받아야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다양한 방법으로 시련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가장 큰 시련은 실제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힘든 일도 시간이 지나면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들은 유치원에 갔다. 이빨 없이 웃는 모습을 오래도록 보았고 때때로 혼자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로 변해갔다.
어느 날 아들은 선생님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아들은 집중력이 좋은 것 같다고 시작했지만 부정적인 표현으로는 선생님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편지글에 서운함과 걱정이 몰려왔다.
그제야 선생님께 편지를 써서 아들의 상황을 전달했다. 아들이 청력이 좋지 않으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글로 쓰면서도 아들의 발달은 문제없이 지나간다고 생각했다. 수리력이 좋은 편이었고 한글을 익히는 것도 어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러 상황 속에서 아들이 조금 느린 것은 청력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 엄마의 이기심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오히려 늦은 대처가 되었음에 마음이 더욱 아팠다.
안경끼고 이빨 빠진 5세의 유치원생 시절
엄마인 내가 시력이 좋지 않아서 아이들의 시력에 대해 걱정을 하던 중 일찍 안과 정기검진을 시작했다. 누나들 처럼 아들 또한 약시라고 했다. 그래서 다섯 살 때부터 시력 교정 안경을 써야 했다. 여러 가지 약점을 안고 살아가는 아들은 다행히도 항상 밝고 활기찼다.
다만 병원에 진료받으러 가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 신생아 때부터 경험했던 주사에 대한 아픈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병원 앞에서부터 전쟁이 시작되곤 했다. 눈에 시약을 넣는 과정에서 아들은 몇 명이 붙잡아도 그 힘을 당해낼 수 없을 만큼 괴력이 나왔다.
서너 명이 붙잡고 강제로 약을 넣었다. 간호사와 가족들의 힘을 모두 빼앗곤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수긍하고 자기의 몸에서 힘을 뺐지만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기운이 빠진다.
고학년 이후 시력이 보완되었고 안경을 벗고도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아들은 유아 시절을 행복하게 살아낸 것 같다. 비록 크고 작은 당황스러운 사건과 아픔들이 그의 근육을 단단하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되었기에 앞을 행해서 달리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들의 세상은 행복해 보였다. 적어도 자신의 길에 다양한 걸림돌이 있다는 것을 불행이라고 여기지 않는 여유로운 성격이 있었기에 많은 슬프고 쓰라린 경험들을 나와 함께 담아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