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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나무 Jul 16. 2021

빌런의 숭고함에 대하여

성인(Saint)들의 시험감독

문득,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모두가 숭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빌런(악인)이 그 자체로 숭고할 수는 없다. 그들이 밀실에서 하는 일들은 정말이지 할말을 잃게 만들 정도로 추하다. 어디까지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존재가 숭고한 성격을 갖는 무엇으로 작동하고야 말게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더이상 아무도 미워하거나 저주할 이유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요즘같은 세상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지 숭고하게 생각하겠지만, 악인을 어떻게 '숭고하다'라는 단어와 연결조차 할 수 있다는 말인지 갸우뚱하기 쉽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그 보기드문 '성인(Saint)'들을 과연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바로 그들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괴롭히던 빌런(악인)들이 아닌가.






달콤한 미끼들로 꾀어내고, 거짓말로 속여내는가 하면, 힘을 이용해 저항할 수 없게 만들어 사람들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고 파괴하고 죽이는 악인들이 있기에 옥석은 가려진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망가지고, 죽는다. 그런 일들을 겪게되면 이 세상에 정의따윈 없으며 오로지 돈과 힘이 전부라고 결론내리고 싶은 강한 유혹이 찾아온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이 달콤쌉싸름한 유혹에 굴복해 피해자가 될바엔 스스로 악인들 편에 서는 것을 택한다.






하지만 위선자나 악인이 되기를 마음 깊이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발버둥치는 소수의 사람들은 결국 세상 모든 돈을 다 준다해도 작은 거짓말조차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양심을 훼손하느니 목숨을 버리는 쪽을 택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성인(Saint)의 탄생이다. 이렇게 숭고한 성인을 한 명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유혹하는 악인, 훔치는 악인, 거짓말하는 악인, 힘으로 눌러버리는 악인 등 많은 악인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그들은 마치 과목별로 성인을 테스트하는 시험감독과도 같다. 그들의 시험을 모두 통과하면 한 사람의 성인이 탄생한다. 마치 성경에서 예수가 40일의 금식 후 광야에 나가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을 통과했듯이.  






날때부터 악인은 없다고 가정하면, 세상의 그 많은 악인들은 모두가 인생의 어디쯤에서 유혹에 무릎을 꿇은 사람들일 것이다. 무릎을 꿇어버린 사람들은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기가 두려워 양심을 때려눕힌다. 그 뒤로는 예전의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게 된다. 시험감독의 탄생, 혹은 사탄의 탄생이다.







만약 천국과 지옥이 진짜로 있다면 악인들은 자신의 몸을 지옥의 불길에 내던져가며 천국으로 가는 성인들을 배출해내고 있는 셈이다. 얼마나 숭고한 살신성이란 말인가. 영원히 타오르는 지옥불의 고통까지 감수하고 타인을 위한 시험감독 역할을 하는 댓가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란 죄지을 때 잠깐씩 느낄 수 있는 짜릿한 쾌감뿐이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이유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시험감독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가. 정말이지 이 세상은 숭고한 인간들로 가득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점을 획득하면 세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다가온다. 겉으로 보기엔 잔혹하고 부조리하고 슬픈 세상이지만, 가장 깊은 내면의 바닥을 들여다 보면 '아름답고 추하고 선하고 악한 세상 모든 것들이 오로지 '성인(Saint)들의 배출'이라는 한결같고 아름다운 목적을 위해 돌아가고 있다'라는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명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가지고 돌아가는 세상엔 빌런과 세인트, 두 가지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 호흡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모든 빌런에게도 세인트가 될 수 있는 작은 문이 열려있다. 하지만 아주 소수의 빌런만이 그 좁은 문을 통과해 세인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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