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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나무 Jul 13. 2021

언젠가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일상을 상실했나요?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가끔 어쩌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서랍속 사진처럼 꺼내 듣곤 하는 <언젠가는>이라는 노래의 도입부 가사는 언제 들어도 새롭다. 마치 걸출한 작가가 진실을 담아 써낸 소설책이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듯이. 좋은 작품이란 ‘러시안 돌’처럼 의미 안에 의미가, 그리고 그 안에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기 마련이고, 그 의미들이란 별다른 부연설명 없이 발견하기만 하면 마치 계시처럼 직관적인 이해가 되어야 한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른다. 젊지 않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이란 공기나 물처럼 무색무취한 존재를 구성하는 분자나 원소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젊은 날에 젊음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일테지만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까. 우선 젊음의 혈기에서 비롯된 실수들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젊음을 더 소중하고 현명하게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젊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젊음에 취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살다가 아차하는 순간에 시간이 흘러버려 별로 지혜롭지도 못하고 존경할만한 구석도 없는 노인이 되어버린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므로 젊은이들 중에 그런 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없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일 것이다.




사랑할 때 사랑을 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이것저것 재거나 따지지 않고 청혼을 했을 것이고, 사랑이 아닌 육체관계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렸을 것이며, 그로인해 인생의 모든 분야가 전체적으로 더 풍성한 가치를 지닐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지나가버린 사랑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는 일도 물론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사랑할 땐 보이지 않으므로 서로에게 이런저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들을 하게 마련이고, 그로인해 사랑은 결국 ‘발견되지 못하고’ 지나간다. 크고 작은 상처만을 남긴채.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가슴을 열고 그 안의 것들을 모두 꺼내서 보여줄 수 있는 사람대신 가슴의 상처를 실처럼 봉합해주고 붕대처럼 감싸서 안 보이도록 해줄 수 있는 결혼 상대를 찾곤 한다. 그런 것도 사랑일 수는 있다. 사랑에는 ‘많은 형태’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랑도 역시 사랑할 땐 잘 보이지 않겠지.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똥개훈련같은 거리두기가 한창인 요즘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일상’의 소중함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라고. 마음대로 여행을 갈 수 있을 땐 여행의 소중함을 몰랐고, 마음대로 지인들과 모여앉아 소주잔을 기울일 수 있었을 땐 그런 자리의 소중함을 몰랐다고. 일상을 누릴 때에는 일상이 보이지 않았다, 라고. (마치 젊음이나 사랑처럼.) 그래서 다시 ‘일상’이 전처럼 주어지기만 한다면 전보다 더 가족, 친구, 연인과의 여행을 열심히 다니고, 지인들과의 모임 같은 것에도 전보다 더 열심히 참여하리라는 마음을 다들 가지고 있어 보인다.




하지만 생각이 거기에서 그치면 안 된다. 마치 젊은 날에 젊음을 알게된 사람이 ‘젊지 않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일상을 알게된 사람들은 ‘일상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판데믹이 찾아오기 전에도 여행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하던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있어왔다. 지인들과의 술자리는 커녕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도 적지않게 존재해왔다. 그들의 눈에 ‘해외여행이 이렇게 소중한지 몰랐어요’라던가 ‘술자리가 이렇게 소중한지 몰랐어요’라는 사람들은 어떻게 비칠까. 해외여행이 원래부터 남의 나라 이야기같던 사람들은 혹시 이대로 판데믹이 영원히 지속되거나, 아니면 훨씬 심각한 판데믹으로 세상에 종말이라도 오길 바라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들이 그런 바람을 갖는 걸 비난할 수 있을까? 그들은 아마도 한때 중산층이었지만 가족이 암에 걸려버렸거나, 사업이 부도를 맞았거나, 사기를 당해 파산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는 ‘노오력’이란 걸 아무리 해도 죽을때까지 사람들이 ‘일상’이라며 누리는 것들을 누릴 수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단지 운이 나빴던 사람들의 불행을 마치 골방에 쳐박아두고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까맣게 잊어버린 물건처럼 취급하며 누려왔던 ‘일상’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때가 온 것은 아닐까.  




‘일상의 상실’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일상이 원래 상실되어 있던 사람들’이다. 내 일상을 잃고 보니 이렇게 괴로운데, 원래부터 일상이란 것 없이 쭉 살아오던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시작이어야 한다.




얼마전 박연미라는 탈북여성이 조던 피터슨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지 않아서 탈북자가 서울 한복판에서 굶어죽는다, 라는 내용의 발언을 하는 것을 듣고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백만명이 넘게 시청한 유튜브 비디오였다. 가족 구성원을 집안에서 굶어죽게 놔두는 게 가족일 수 없듯이, 국민 구성원을 나라안에서 굶어죽게 놔두는 게 국민일 수 없다. 우리들 모두는 국민자격을 상실했다. 그 사건을 몰랐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럼 알게된 지금은 똑같은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 어떤 일을 하겠는가.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면 그런 사람을 국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너무 뻔하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이 국민인 나라의 미래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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