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을 시키면 옆사람이 먹는 짬뽕이 맛있어 보이고, 짬뽕을 시키면 옆사람이 먹는 짜장면이 맛있어 보인다. 그래서 배달의 겨레가 개발해낸 기가막힌 메뉴 짬짜면. 하지만 짬뽕 반 그릇 짜장면 반 그릇의 짬짜면은 정말로 우리에게 짜장면 한 그릇, 짬뽕 한 그릇보다 충만한 만족을 주는 것일까. 단순히 개인의 취향일 뿐일까.
만약 짬짜면을 먹는데 옆에서 누가 라면을 끓인다면 또 라면이 한 젓가락 먹고싶어지지 않을까. 국물도 한 숟가락 떠먹고 싶고. 그럼 짬짜라면을 개발하면 될 일인가. 그렇게 결국 ‘탕볶짬짜라떡튀순김밥’이라는 단일메뉴를 기어코 만들어내고야 말 것인가. 이미 떡볶이에는 당면과 라면과 순대와 튀김과 곱창과 모짜렐라까지 들어가고, 짜파게티에는 너구라와 한우 고명이 섞이는 현실을 볼 때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혹시 자기가 선택한 대로, 짜장면이면 짜장면인대로, 짬뽕이면 짬뽕인대로, 감사하며 천천히 주의깊게 음미하는 편이 제일은 아닐까. 이것 저것 맛있어 보이는 것들을 모두 맛보겠다며 욕심내는 것보다 무엇이든 하나만을 선택해서 충실하게 먹는 편이 낫지 않을까. 과거에 어느 나라 귀족들처럼 온갖 산해진미를 맛만 보고 토하거나 뱉어내는 것은 과연 만족스러운 일일까. 그들은 만족스러웠을까 아니면 끝내 채울 수 없는 욕구 때문에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밭에서 김매다 새참 먹는 농부들보다도 불만족스러웠을까. 생각해 볼 문제다.
지난달에 먹은 조선호텔 스시조가 제아무리 맛있었다 한들 막상 가만히 떠올려보면 그 맛을 제대로 기억조차 할 수 없다. 마치 안개로 만든 인형처럼 보일듯 보이지 않고 잡힐듯 잡히지 않는다.
특별한 음식을 먹은 ‘기억’보다 배가 고픈 지금 앞에 놓인 간짜장 한 그릇이 훨씬 만족스럽다. 어차피 두세 시간 후면 간짜장이나 오마카세나 똑같이 되어버린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일 년 전에 먹은 스시나 떡볶이가 지금와서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기억이나 나면 다행이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라는 말은 거짓이다. 귀신은 그냥 귀신 때깔이다. 그러니 때깔 좋은 귀신이 되려고 살아있는동안 좋은 걸 먹으려고 노력하는 건 바보짓이다.
물론 맛있게 먹는 건 중요하다. 맛있게 먹어야 감사하고, 감사히 먹어야 맛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눠 먹어야 맛있다. 혼자 먹는 오도로보다 나눠먹는 칼국수가 더 맛있고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음식을 먹으면서 나눈 말과 마음은 종종 평생을 두고 기억에 남는다.
결국 우리는 말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기 위해 먹고, 마시고, 살아간다. 입에서 살살 녹고 눈이 절로 감기고 온몸이 부르르 전율하는 음식을 아무리 반복해서 먹어도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스시만 먹고 산다고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된다거나 하는 일도 없다. 말고기를 먹었다고 달리기가 빨라지지도 않는다. 앞으로 먹고 뒤로 나오는 다람쥐 쳇바퀴일 뿐이다.
무얼 먹든 누구와 어떤 말로 어떤 마음을 나누면서 먹었는지, 설령 혼자 먹더라도 무엇을, 누구를 생각하면서 먹었는지가 모든 의미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지속적인 만족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데나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자리’라는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는 것은 좋지 않은 습관이다. 나한테 도움 될듯한 사람들을 만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동질감을 고취해가며 이제 안면 텄으니 나중에 서로의 뒷구멍이 되어주자는 무언의 합의를 공고히하는 자리는 그저 욕심과 욕심이 만나 동상이몽하며 낄낄거리는 삼류 극단의 연극무대일 뿐이다.
난 당신을 생각해. 당신이 잘 먹고 다니는지 신경 쓰여. 당신과 같이 먹으면 뭐든 더 맛있어. 당신은 나에게 가족 같은 존재야. 어쩌면 우리는 메뉴에 신경을 쓰기보다 좀더 많은 사람들과 식사를 통해 이런 마음을 나누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것만이 앞으로 먹으면 뒤로 나오는 것의 반복일 뿐인 음식 먹는 행위가 인생의 의미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닐까. 만나서 식사 한 번 하기 어려운 시절이 되니 비로소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식사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