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나무 Feb 23. 2022

네가 신경쓰여

예전 어느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대사로 “네가 신경쓰여”를 사용해서 신선한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다. 역시 사람 마음은 다 똑같은지 그 대사는 곧바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많은 패러디를 낳았었다.




너를 좋아해, 너를 사랑해, 같은 대사는 어쩌면 사랑을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과할 수 있다. 나를 얼마나 안다고, 내 본모습을 몰라서 그래, 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냅다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오면 혹시 이 사람이 욕정에 눈이 먼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부터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성으로부터 ‘네가 신경쓰여’라는 말을 들으면 부담 없이 적당히 설렐 수 있을 것 같다. 잘 모르지만, 너라는 사람도 잘 모르고 내가 왜 이러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네가 자꾸 신경이 쓰여, 자꾸 생각나고 마음이 가, 라는 말이니까.




네가 신경쓰여, I care for you, 나는 이 말이 사랑의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표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강렬히 갖고 싶은 욕정이나 소유욕도 아니고, 값싼 동정도 아닌, 그냥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 그런 게 사랑이 아닐까. 마치 초등학교 교실에서 수업시간에 어떤 애를 자꾸만 힐끔거리게 되는 그런 마음,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학교가서 그애를 볼 생각부터 드는 그런 마음이 사랑의 모든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사랑의 시작 정도는 되지 않을까. 누가 그애를 괴롭히거나 놀리면 욱하고 화가 치밀고, 그애가 운동회날 달리기를 하면 혹시 넘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에 다른 애들은 누가 뛰는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그런 마음.




그러다 머리가 커지면서 언제부턴가 딴생각을 품게 됨으로써 사랑을 모르게 되어버린다. 어려서는 알던 사랑을 더이상 모르게 된다. 옷을 벗기고 싶고, 남에게 자랑하고 싶고, 덕을 보고 싶은 여러가지 ‘현실적인욕망이 일단 똬리를 틀게 되면 사람들은 언젠가 다시 사랑의 의미를 찾을때까지 50년의 부부생활을 수업삼아 힘들게 공부를 해야만 하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상대방이 '신경쓰이는 마음'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 가려져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은은한 꽃향기가 인공적인 향수냄새에 가려지면 맡을  없게 되어버리듯이.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사랑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남녀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가족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친구의 사랑이 무언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언지. 심지어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이 신을 사랑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도.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붙여 황홀한 말들을 늘어놓고 값비싼 선물을 하더라도 ‘그냥 가만히 있어도 자꾸만 저절로 신경이 쓰이는 마음’이 없다면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나에게 달콤한 것들을 가장 많이 선사하는 사람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내가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도 자꾸만 나를 신경써주는 마음이 진짜 사랑이라는 것도.




드디어 ‘5세 이상’ 아이들에 대한 접종이 언론기사를 통해 발표되었다. (다음은 5세 미만 영유아 차례다.) 뉴스기사에 달린 한 아이엄마의 댓글이 기억에 남았다. 내가 2차 맞고 죽을 뻔 했는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맞힐 수가 있느냐, 우리 아이는 절대로 안 맞히겠다,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저항하겠다, 는 내용이었다.




그 아이엄마는 누군가의 스무살 딸이 자취방에서 혼자 주검으로 발견되고, 17살 아들이 쓰러져 급사할 때 왜 자발적으로 두 번씩이나 접종을 했을까. 그래놓고 왜 이제와서, 자기 아이의 연령대까지 내려오고서야 펄쩍 뛰고 있을까. 이 세상에 더이상 사랑이란 찾아볼 수 없구나 하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이웃을 사랑했으면 남의 집 아이들이 ‘신경쓰였을’ 텐데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를 사랑했다면 국민들이 ‘신경쓰였을’ 텐데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혹은 살짝 신경이 쓰이는가 싶었지만 ‘사회생활’이란 것을 해야만 하기에 신경쓰이는 마음을 집어던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자기 자식에게 주사바늘이 향하자 이제 사회생활 따위 모르겠고 무조건 끝까지 저항하겠다는데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반성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세계적으로 비접종자를 연애 및 결혼 상대로 찾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맞았는데도 안 맞았다고 거짓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런 현상의 기저에는 단순히 ‘깨끗한 피’ 이상의 의미가 깔려있다고 보인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남을 신경쓸 줄 아는’ 즉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몸, 내 가족의 몸은 끔찍하게 챙기면서 누군가가 주사맞고 급성 백혈병에 걸리거나 급사하거나 중증 부작용에 걸렸다고 하면 ‘어떤 약이든 소수의 특이체질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혹은 못 본 체 주사를 맞다가 부작용을 직접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저항하는 사람들. 또는 아직까지 나와 내 주변이 모두 이상없어서 득의양양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랑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까. ‘네가 신경쓰여’가 아니라 ‘난 널 원해’라고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건 너무나 비극적이다.

작가의 이전글 지옥을 아시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