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여유가 있는 주말이면, 청량리 청과물시장에 간다. 비싼 가격 때문에 좀처럼 먹을 수 없었던 과일을 여기서는 큰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다. 가게마다 가격이 조금씩 다르고, 신선도도 다르다. 마트에서는 랩으로 깔끔하게 포장된 음식에 매일의 식단이 좌우되곤 하지만, 시장에서는 일인가구의 장바구니에 부담되지 않게 소량 구매도 가능하다. 너그러운 사장님을 만난다면 말이다.
생기 넘치는 시장을 오래 걷다 보면 일상의 조각들이 조금 각별하게 느껴진다. 오늘은 리어카에 수북이 쌓인 흑설탕 더미를 보았다. 윤기가 흐르는 흑설탕은 네모난 나무 되로 측량하여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 옆엔 통후추도, 곱게 빻은 후추도 수북이 쌓여있었다. 단골손님인듯한 할머니가 "아유 잘 지냈어요. 저번에 생강이 너무 좋았어." 라며 후추 더미 옆을 지나 사장님 곁에 앉았다. 나는 그 사장님께 생강 반근을 구매했다. 어쩐지 한 근 단위로 파는 것을 반근만 사는 것은 죄송해서 제가 혼자 살아서...라고 말을 꺼냈더니. 사장님은 괜찮다고 젊은 사람이 필요한 만큼만 알뜰하게 잘 사는 거 좋은 거라며 또 오라고 하셨다.
시장은 한창 여름이라 초록색 여주가 여기저기 진열되어있고, 매끈한 가지가 반짝이며 누워있다. 알이 큰 자두, 천도복숭아가 인기고, 커다란 수박도 시장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아오리 사과가 있었다. 보통 장마가 끝나고 가장 더울 때쯤 나오기 시작하는 아오리 사과. 나는 그 상큼하고 아삭이는 여름 맛이 좋다. 가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조금 멀찍이 아오리 사과만 파는 곳이 있다. 지난 주말에도 그곳에서 사과 세 개를 천 원에 사서 평일 아침마다 잘 먹었더랬다. 맛이 좋고 저렴해서 다시 그 집을 찾았다. 이번에는 두 개에 천 원이었다.
나는 엄마뻘의 사과를 파는 사장님께 지난주에 샀던 사과가 무척 맛있었다고 인사를 드렸다. 사장님은 상기된 목소리로 그래서 오늘은 얼마나 살 거냐고 물으셨다. 나는 천 원어치라고 말했다. 사장님은 너무나 실망을 하시면서 아니 그거밖에 사지 않냐고, 두 개만 사다니 너무하다고 음조가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머쓱해져서 "죄송해요. 제가 혼자 살아서.."라고 말을 꺼내자. 말을 끊으시며 "그런 얘기 하지 마. 그런 거 듣고 싶지 않아."라고 하셨다. 사장님이 검은 비닐봉지에 사과를 하나, 두 개 담으시는데, 두 개 째의 사과를 진열된 뒤쪽에서 꺼내 담았다. 엄지손톱만 한 갈색 멍이 있는 사과였다. 나는 부당함을 느껴 봉지에 두 번째 사과가 들어가자마자, 그것 말고 다른 것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사장님은 그럼 뭐! 어떤 거! 라며 두 번째 사과를 꺼내서 내려놓으셨는데, 그러다가 손이 미끄러져 사과가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몇 발자국이나 떨어진 검은 아스팔트 바닥에 초록 사과가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 사과를 집어서 사장님께 드렸다. 갈색 멍과 더불어 새로 500원짜리 동전만큼 속으로 멍든 그 사과를.
사장님은 화가 나서 거친 숨을 쉬며 아니 내가 무슨 멍이 든 사과를 넣었다고 그러는 거냐며 뭐라 하셨다. 나도 기분이 나빴다. 나는 정당하게 천 원에 두 개인 사과를 사려했고, 멍이 든 사과 대신 다른 것들과 같은 멍이 들지 않은 사과를 사고 싶었다. 사과가 떨어진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결국 사과 두 개를 받고 천 원 한 장을 냈다. 뒤돌아서 걷는데 뒤통수가 따가웠다. 내 손에는 천도복숭아 7개, 비트 1개, 찰보리쌀 한 되, 당근 두 개, 돼지고기 뒷다리살 1근, 양파 5개, 고구마 한 바구니, 생강 반근이 있었다. 그다지 덥지 않았는데 땀이 흘렀다. 이제 살 것을 다 사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려는데, 계속 뒤통수가 따가웠다. 아니, 뒤통수가 아닌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사과를 샀어야 했다. 데굴데굴 떨어져서 내가 주워서 다시 사장님 손에 쥐어드린 그 500 원하는 사과를 말이다. 나의 500원어치의 정당함, 옳음이 과연 다른 이의 하루를 망칠 만큼 중요한 것이었을까? 그보다 못한 질의 과일을 몇 배의 가격을 받는 마트나 온라인 매장에서는 그저 파는 대로 구매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사과에, 가격도 저렴하고 질도 좋은 사과에 갈색 멍이 있다고 본의 아닌 소란을 피우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이었을까?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며 마음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그 간지러움은 다시 뒤돌아 가게로 가서 그 사과를 산다면, 죄송하다는 말을 한다면 어느 정도 사라졌을지 모르겠다.
사과가 떨어졌다. 나는 그 사과가 어디로 떨어졌는지도, 그 사과가 어디로 가야 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나는 두 손에 든 것이 너무 무겁다는 핑계로 뒤돌아서지 않았으므로 계속 마음이 간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