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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ㅡ Nov 27. 2022

삼대째 호흡곤란

- 그녀와 나와 그의 불안한 숨결 -


두려웠다.

이유 없이 숨을 들이마실 수 없던 몇 년간.


무엇이 두려웠는지 생각해 볼 틈은 없었다.

그저 숨을 들이켤 수 없을 때 공포감,

그 자체에서 오는 두려움이었을까?


그러기엔 그때마다 "지금 숨이 쉬어지지가 않아요."라고 솔직하게  내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배가 아파요.",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처럼 무심코 내뱉어지는 말이 아니었다.


꾹 삼켜내야 하는 말. 

말로 내지 말라고 누군가가 금지령을 내린 것이 아님에도 합리적인 이유 없이 고통스럽다는 표현응당 내면 안 되는 이었다. 이상 마음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몇 년만 적응하면 고통도 사 줄 알았다. 그리고 사직을 하면 자연스레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내 마음속 작은 곳, 어느 즈음에서.




얼마 전, 아이와 건널목을 거의 다 건넜을 즈음, 갑자기 숨을 들이켤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솔직하게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

"잠깐만"

몇 분 정도 흘렀을까,

조금 나아진 뒤에 말해주었다.

"아까 잠깐 가슴이 아팠는데 너무 빨리 걸었나 봐. 엄마랑 발걸음 맞춰 걷느라 그동안 힘들었겠네. 천천히 걷자."


장족의 발전이다. 예전엔 고통스러운 표정을 들킬까 봐 그때마다 그대로 바닥에 웅크리거나 엎드려 감추며 방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이런 것으로 아픈 내가 싫었고 이런 것으로 아프다고 아이들에게 말로 내면 안될 것 같아서.


그리고 다 사그라들면 아무렇지도 않게 더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집안일을 했다.

즐거운 척.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그런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배나 머리가 아픈 것처럼 아프다고 솔직하게 말로 내었다.

처음으로.


째깍째깍 몇 분의 긴 고요의 시간 동안 아이는 나의  잡아주었 기다려주었으며, 헤어지는 길에 병원을 들러보라고 말해주었다. 배가 아팠을 때처럼. 

이렇게 아무 일도 아닌 것을 수년간 나 혼자 꽁꽁 앓고 있었던 게다.



지금 내 마음의 많은 것들이 그렇지 싶다.

내가 옭아맨 작은 어둠의 보따리일 뿐, 삼켰던 일들을 이곳에 꺼내어 가지런히 펼쳐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일지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혼자 이라도 는 것처럼 꽁꽁 감추며 삼켜내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크게 나쁠 것도 없는 보통의 일들을 내가 어둡고 캄한 색으로 칠해  뭉쳐 마음 어두운 구석에 툭 던져놓았던 것이지 싶다. 밖에 꺼내어 버리는 방법도 모르면서. 그저 곱게 칠해 결결 꺼내놓을걸.




내가 한창 호흡곤란 정점에 있을 즈음, 첫째 아이 9살 즈음이었다.

그가 말했다.

"엄마, 나 숨이 잘 안 쉬어져."

자정 무렵 퇴근한 어느 날엔 자다 일어나 말했다.

"엄마, 나 숨이 안 쉬어져서 깬 거야. 자다가 죽을까 봐 겁이 나서 못 자겠어."


심장이 했다.

'분명 내가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고 말로 낸 적이 없었는데..'

생각하다 갑자기 깊은 구석에 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대학시절의 어느 날, 밤늦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숨을 못 쉬겠어."

말과 함께한 헥헥거리며 숨이 넘어가듯 우는 고통스러운 소리, 그리고 소리가 아닌 것 같은 소리들과 뜬금없는 고맙다는 말.


강남 고속터미널로 달려가 울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곧장 던 터라 피곤함과 배고픔,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마음에 뒤섞여 토할 것 같았다. 6시간 동안 버스에서 너무나 괴롭고 무서웠다.



새벽에 도착해 들어가니, 엄마는 "뭐 하러 왔어?"라며 아침밥을 해주셨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가족들에게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보통의 평범한 아침이었을 테다.


  그랬듯 정적 속에 밥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타러 갔다. 학교 수업은 빠질 수 있었지만, 아르바이트를 대신할 사람을 구할 수 없었기에 바로 돌아가야 했다.



엄마도 숨기고 싶었을게다. 가족들과의 불화로 참고 참다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으니, 무섭고 두려워 내가 떠올라 무작정 전화번호를 눌렀을 터였다.


그러고 후회했을 것이고. 


달려온 내게 고맙고 미안해서 따뜻한 밥을 해주며 말을 대신했을 것이다. 슬픔, 고통, 눈물, 내지 못한 말들밥을 넘기며 고스란히 삼켜내셨을 테다. 


그날 밥을 먹으며 엄마는 전날 일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열어내고 지 않으신 것 같아 나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난 아이들 앞에서 나의 호흡곤란을 들킬까 봐 두려웠다. 는 자의 공포감을 알고 있기에.


그런데 아이가 같은 증상을 말할 때는 혹여 유전적인 요인이 있을까 싶어 병원을 찾게 되었고 대학병원에서 아이는 고질적인 아토피로 의심되는 천식검사를 시작으로 몇 번의 정밀검사를 마친 뒤, 아무 이상이 없어 국에는 소아정신과로 안내되었다.


아이를 잠시 나가게 하고 솔직하게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사실 가 같은 증상을 겪고 있다고. 지만 끔씩 찾아오는 호흡장애를 말로 알리거나 고통을 직접적으로 보게 한 적은 없다고.


그분은 내가 나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나을 거라며, 본인을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내게 드시 병원을 가보라고 하셨다. 것이 내가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사실 무섭게도 나와 증상이 비슷한 시기에 같이했다. 나의 증상이 극심했던 때에 아이도 숨 쉬는 것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컸고, 지금은 나도 그도 많이 좋아졌다. 물론 간혹 나처럼 뜬금없이 숨 쉬기가 힘들다고 말하지만 아주 많이 좋아졌다.



이들은 부모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기민하며, 부모가늠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부모사랑한다.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되었다. 나의 사랑이 아이가 내게 주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한지.


함께 신나게 숨 쉬며 살아가기 위해 나는 달라져야 다. 이것이 당시 내가 바뀌어야 하는 큰 이유였고 나의 첫 번째 반항, 사직을 결심한 이유였다.



아이들이 행복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즐겁지 않은 날도 그런 그 모습 그대로 흘려보낼 줄 알고, 아플 때는 내가 어디가 아픈지를 숨기지 않고 함께 나누며 이겨내길 바란다. 희로애락의 모든 순간들에 혼자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신나게 자신의 삶의 숨결에 귀 기울이고 느낄 줄 아는 아아들이 되길 바란다.



방학엔 우리 다시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해 보자!
맘껏 숨을 들이켤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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