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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ㅡ Mar 12. 2023

들켜버렸다.

- 돌이킬 수 없는 한 페이지 -


모든 순간을 마음에 저장해 둘 수는 없을 테지만, 나는 많은 것들을 기억해 두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착각했다.


내가 써 내려간 마지막 한 페이지,

그 순간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나의 기억상자에 담아지고 그렇지 않고의 기준을 알 수가 없다.




첫째 아이가 6학년이 되는 이번 겨울방학, 책을 좋아하지 않던 는 우연한 기회로 평소 그의 기준에 비해 과도하게 글밥이 많은, 청소년 문학도서 한 권을 읽게 되었다. 이후 말 그대로 책의 세계에 푹 빠져 매주 책을 고르고 싶다며 서점에 가자고 졸다. 


두 아이 모두 책에 관심이 없는 아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나서 가까운 도서관 두 곳을 정해두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책을 대여하여 읽어주었던 터라 집에 보유하고 있는 책이 많지 않았다. 부러 주말마다 도서관이나 서점을 꼭 들렀었지만 언제나 빨리 집에 가자고 졸랐던 아이.


그랬던 아이가 도리어 내게 서점데이트를 요청했을 땐, 솔직히 믿지 않았다. 숨겨진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대도 그냥 데이트도 아니고 서점데이트라니, 신나게 나설 수밖에.


그렇게 방학을 함께 보내어 보니 아이는 진심이었다. 혼자 이곳저곳의 책을 훑어내며 자신의 취향이 가득한 책들을 골라 담아내었고 방학 내내 책 읽기에 빠져 냈다.



그러다 나의 책장에까지 그의 손길이 미쳤다. 몹시도 늦게 책 읽기를 시작했던 나는 청소년문학도서를 즐겨, 여러 권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잊고 있었지만.


나는 몇 년 전 호흡곤란의 어려움을 잊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특히 출퇴근길, 나를 둘러싼 스트레스 상황들을 망각하기 위해,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책의 세계로 뛰어든 것이다. 그래서 단기간에 필사적으로 그곳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리고 분명 그때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터져버릴 것 같은 나의 마음을 내어놓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이 알아챌까 봐.

그야말로 오랜 시간 호흡 곤란을 겪었을 만큼 간곡하게 애를 썼다. 

 

그런데 왜 하필 그곳에 글로 쏟아 내어놓았을까. 


나는 기억이 없다. 알았다면 아이가 그 책을 읽게 두지 않았을 테고, 고이 그 페이지는 찢어 버렸을게다.




아이가 밤늦게 책을 읽다 나와 물었다.

"이거 엄마가 쓴 거예요?"


휘갈겨 썼지만 분명 내 글씨였다. 기억나지 않는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 나 같은 존재는 없어야 한다."


 왜 그 아름다운 책의 맨 끝, 빈 페이지를 아무 상관도 없는 나의 어두컴컴함으로 빼곡히 채워놓았을까.


아이 앞에서 도저히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이가 잠들고 나서 몰래 꺼내 읽어보았다.



그때 나는 내가 아니었던 게다. 그래서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긴 글을 쓰 어느 순간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부디 이 페이지가 아이의 기억상자에 담기지 않길 바랐다.




다음날, 아이는 다시 그 책을 집어 들었다. 나는 그 페이지를 찢어버리지 않았다. 내가 숨겨내면 오히려 그의 마음속 어딘가 말 못 할 비밀상자에 담길 것 같아서. 그저 보통의 일들처럼 설명해주고 싶었다.



"이 책 재미있어? 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책을 읽기 시작했어. 그럴 때엔 책이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주었지. 힘들었던 내 마음도 다 써서 보여줄 만큼. 물론 너는 앞으로 즐거운 일들만 가득할 테지만, 어쩌다 너무나도 힘든 때가 온다면 그때는 엄마한테 꼭 얘기해 줄래? 나는 한 번 겪어보았으니까 너보다 이겨내는 방법을 잘 알지도 모르잖아. 엄마도  시절, 그 순간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이렇게나 좋아하는 그림, 그려보지도 못했을 거야. 다행이지? 혹시라도 스스로 감당하 어려운 순간이 온다면 내게 꼭 말해줘. 내가 이겨낼 수 있는 법을 알려줄게."




아이는 잘 이해하였을까. 

너무 장황했나.

쓰는 법도 말하는 법도 잘 알지 못하는 나는 나의 자리에 돌아와서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속을 열어볼 수도 없는 일. 나의 말속에 꽁꽁 매어둔 진심이 전해지길, 언젠가는 부족했던 나의 말을 이해하는 때가 올 거라고 믿는다. 믿고 싶다.


나는  바랄 것이 없다. 그저 아이의 힘든 순간에 떠올려지는 사람이고 싶다. 그때의 내게 책이 그래주었듯이.




내가 써버린 마지막 페이지는 아이의 마음에 어떤 색으로 남겨졌을까. 슬픔의 색은 아니기를. 소소한 일상의 한 순간, 눈에 띄지 않는 보통의 색이기를. 감히 바라본다.


그리고 그의 손길이 또다시 미칠지도 모르는 나의 책장 속 책들을 잔잔히 점검해보려 한다. 기억나지 않는 나의 버려진 기억들을 고요히 더듬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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