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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 Oct 12. 2023

정말 결혼할 사람은 느낌이 올까?

02. 사랑이 취미인 여자가 사랑이 특기인 남자를 만나면

진짜 결혼할 사람을 만나면 느낌이 와?

본격적인 결혼 준비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성의 경우 31.1세

남성의 경우 33.4세가 초혼 평균 나이이며,

"결혼을 안 해도 된다."라고 응답한 미혼 남녀의 비율이

51%를 넘어가는 나라에서


모은 돈 1도 없이 결혼이라니,

상대가 아직 직업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을 외쳤다니!


나는 항상 모든 연애의 끝은 '결혼'이라 생각했다.

다시 말해,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B를 만나서 처음 한 게 아니라는 말씀.


그렇다면 지나간 엑스들과, B에 대한 내 마음은 무엇이 달랐을까?

돈 없는 내가 얼른 남편으로 만들고 싶을 만큼

돈이 많은 사람이었을까?



가난을 숨길 수 있는 건 사랑뿐


본격적인 얘기를 앞서 나의 유년 시절에 대해 살짝 풀어보자면,

나는 주소에 '산'이 들어가던 가난한 집의 첫째 딸이었다.


지금은 방송국 본사가 들어서고

'디지털미디어시티'라는 이름까지 얻게 된 상암동은,

30년 전엔 지금과 사뭇 다른 곳이었다.


서울의 모든 쓰레기가 모인다는 난지도 옆이었고,

각각 경상도에서 전라도에서 상경한 부모님이

벼룩시장 신문을 손에 들고

어디가 집값이 싼가, 살펴보다가 들어오게 된 동네였다.




온통 산으로 둘러 쌓여 있던, 주소에도 '산'이 들어가던 상암동 우리집


우리 집은  바로 뒤가 산이라

비 오는 날이면 혹시 모를 산사태에 대비해

온 가족이 아빠 봉고차에서 자곤 했다.


시동을 걸 때마다 '달달' 소리가 나서

'달봉이'라고 불리던 아빠의 봉고차.

뒷좌석을 모두 눕히면 침대처럼 쓸 수 있었는데,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엄마와 두 딸이 잠든 날 밤에도,

아빠는 혹시나 산이 무너질까,

집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느라 한숨도 못 주무셨더랬다.


그뿐인가? 손님이 오면 천장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쥐를

누가 보지는 않을까 엄마는 늘 노심초사였고,

산 중턱에 위치한 우리 집은

택배도, 배달 음식도 오지 않는 곳이었다.


여행을 가면 '펜션'을 예약해 잠을 잔다는 사실을

나는 성인이 돼서야 알았다.

우리의 숙박은 늘 텐트 아니면 '달봉이' 안이었으니까.


여름이면 온 가족이

라면, 된장, 각종 반찬과 텐트를 갖고 계곡으로 떠났는데

한번 가면 일주일을 계곡에서 씻고 계곡물로 밥 해 먹고 텐트에서 잠을 잤다.


어느 날은 갑자기 내린 비에 삽시간에 계곡물이 불어

한밤중에 텐트를 철수하고 봉고차로 돌아간 적도 있다.


여름이면 우리집이 되어주었던 텐트


나는 지금 우리 가족의 '가난'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가스비를 내지 못해 버너로 밥을 해먹으면서도

우리 부모님은 나와 내 동생이 가난을 느낄 ''을 주지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우리 집은

어느 날 밤 11시에도 갑자기 라면 몇 개 챙겨 즉흥 여행을 떠나는,

화목하고 가정적인 집이었다.

상암동 땅 부자 할아버지의 손녀로

건물 한 채를 가지고 있던 친구도 우리 가족을 항상 부러워했다.


때로는 고기집으로 변신했던 우리의 달봉이


한마디로 나는 '사랑'이 최우선 조건인 집안의 장녀였다.

나의 유년이 풍족할 수 있었던 건 돈 때문이 아니라,

가난이 티 나지 않게 부단히도 노력한 부모님의 사랑이었다.


누군가 그랬다. 재채기, 가난,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하지만 나는 안다. 사랑은 가난을 능히 숨길 수 있다고.



"3개월로 해주세요." 행복도 할부인 것 같던 순간이 있었다.


물론 고등학생이 되면서

'아, 우리 집이 넉넉하지는 않구나' 느끼게 된 순간들도 있었다.


같은 반 친구 교복 재킷에 카레를 실수로 흘린 적이 있는데,

세탁소에 맡겨도 얼룩이 빠지지 않았다.

새벽 5시면 출근 해야 하는 아빠가 잠까지 줄여가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 지워보려 했지만 얼룩은 살짝 연해지기만 할 뿐 요지부동이었다.


그 당시 교복은 무상 제공이 아니었기에 새로 사줘야 했는데,

문제는 우리 집에 교복값 12만 원(기억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쯤 됐다.)이 없었다.


분당에 살며 MCM 가방을 들고 다니던 친구는, 아니 정확히는 친구의 어머니는,

우리 집이 그 돈을 변상해주지 못하는 걸 처음에는 '순수하게' 이해하지 못하셨다.


12만 원이 없다고?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나는 사립인 A 예술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일반고 학비의 세 배였기에

반 친구들은 대부분 중산층이었다.

(엄마가 교장선생님께 자필로 편지를 써 학비 면제를 받은 것까진 모르셨을 터.)


결국 우리 집 사정을  친구 어머님께서

감사하게도 반씩 부담하자고 하셔서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절반의 가격을 줄 수 있을 때까지 나는 내 재킷을 친구에게 빌려줬고,

얇은 후드 집업을 입고 등교를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엄마의 꼼꼼함과 아빠의 성실함으로

집을 사고 사업에 필요한 포레인도 샀지만,

그 당시 나는 우리 집의 '할부' 인생이 좀 싫었던 것도 같다.


우리 집은 왜 맨날 '할부'란 말인가? 우리 인생에 '일시불'은 없는가?


엄마의 "3개월로 해주세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우리 집의 행복도

남들보다 3개월 더 나눠서 도착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정말 잠깐이었고,

부모님은 오히려 미래의 행복까지 '영끌'해다가 우리를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다시 돌아와서, 경제적 능력보다 사랑이 최우선이었던 내가,

B와 결혼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다시 얘기해 보자.


사랑이 취미인 내가 아무리 큰 사랑을 건네도,

B는 더 큰 사랑으로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내가 B를 사랑하는 일은 마치 바다에 물을 붓는 것만 같았다.

너무 큰 B의 사랑 안에서 내 사랑은 활개를 쳤다.


당시 결혼을 50일 앞두고 내가 SNS에 결혼 소식을 알리며 쓴 글로 대체하려 한다.



열네 살 중학교에 입학할 때는 큰 교복이 맘에 들지 않았던 기억밖에 없는데,

결국 그곳에서 예비 남편을 만났습니다.

친한 언니가 한 번은 왜 꼭 그 사람이어야 하냐고,

그냥 결혼 적령기에 그 사람이 나타난 게 아니냐고 물었던 적이 있어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인데요.


좋은 시기에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까지 결심하게 된 건 맞지만

이 사람을 만나고 나서는 다른 사람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어요.


앞으로의 내 시기에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좋은 사람이 나타날 확률?

없다고 할 수 없겠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남편에게도 나보다 좋은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는 거고, 에헴.)


그렇지만 저는 이 사람 이후의 누군가가 전혀 궁금하지 않아 졌어요.

남편은 저에게 그런 사람이에요.


각자 단점이 없지 않지만 서로의 단점이 서로에게 전혀 상관이 없어 결혼을 결심했고,

다가오는 초여름, 결혼합니다.





  그런 그가, 그러니까 왜, 결혼 아니면 헤어지자는 말에 3일 동안 잠수를 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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