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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 Oct 13. 2023

ENFP 여자, INFJ 남자의 갈등 해결법

03. 아니 그게 잠수 아니면 뭔데?

모은 돈 없는 4년 차 프로 이직러 여자가,
 소설가 지망생인 휴학생 남자에게 '결혼' 얘길 던졌다.


아무것도 없이 너만 있으면 되고,

단칸방 월세에서 시작해도 된다고 했다.


남자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

나도 너만 있으면 돼, 먼저 얘기해 줘서 고마워!

감격하며 당장 결혼 준비를 시작했을까?



"... 그럼 이번 가족 여행 때 결혼 하고 싶다고 말씀드릴게."


눈물 콧물 범벅의 답을 예상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너랑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다는데!


마치 모든 결정권이 가족에게 있는 듯한

이 미적지근한 대답은 뭐지?

나는 잠깐 멍- 했지만 그것이 B의 매력이라 생각하며

잘 다녀오란 말로 B를 보냈다.


당시 가족 여행의 구성원은

B의 부모님-추후 나의 시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누나의 남편이었다.

나는 언제쯤 B 가족의 일원이 되어 여행하려나?

꿈에 부풀어 그날 저녁이 되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B에게 문자가 왔다.


- 다들 깜짝 놀라셨어, 너무 급작스럽다고.

왜냐면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하시고

그거 관련해서 너희 부모님 생각도

많이 걱정이 되시나 봐.

당연하지만 금전적인 부분이랑 집 관련해서

확실한 결론이 없으니까 더 준비 시간을 가지라는 생각.

그래서 결국 내 미래에 대한 얘기로 다시 얘기가 옮겨졌어.


지금 생각해 보면 시부모님 말이 백 번 옳다.

당시 B는 나와 데이트하기 위한 과외만 하고 있는

소설가 지망생이었고,

나 역시 모아놓은 돈이 넉넉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계획'이 없었다.

그저 '헤어지기 싫은 마음'만 있었을 뿐.


B의 문자를 받았을 때 내 머릿속은

너무나 당연한 현실에 대한 수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려오는 서운함으로

온통 엉망이었다.


그런데 그 서운함의 대상이 도무지 없었다.

결국 서운함의 화살은 B에게로 향했다.

모처럼 떠난 가족 여행 분위기를 망칠 순 없어

우선 잘 자라는 말을 건넸다.


다음날, 여전한 서운함을 꾹꾹 눌러 담아 문자를 보냈다.

B가 가족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었고

우리는 그날 데이트가 예정돼 있었다.


- 그럼 너는 어제 다른 말 안 드렸어?


- 응, 내가 막 반박을 한 건 아니야.  


- 그럼 우리 결혼은 무기한 연기인가...?

우리 부모님도 상황을 모르시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B는 진흙 속의 진주니까

애매한 사회 생활 하게 해서 때 타게 하지 말라고,

꾸고 있는 꿈 꼭 이루게 해 주라고 하셨어.


아니다, 우리 이러지 말고 만나서 얘기하자.


- 오늘은 쉴래.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이렇게 싱숭생숭한 날 두고,

오늘 데이트를 취소하겠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B의 잘못도 아니고,

양가 부모님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고,

그저 20대의 미성숙한 우리가 성급했을 뿐이다.


하지만 밀려오는 서운함을 누구한테 털어놓는단 말인가?

결국에는 B에게로 화살이 꽂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본질적인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남자, 나랑 정말 결혼하고 싶은 걸까?

그냥 내가 좋다니까 그러마, 따라오다가

아니다 싶어 브레이크를 걸려는 건 아닐까?


물은 결국 불을 이긴다


는 갈등이 생기면

그날로 해결을 봐야 하는 불이었고

B는 갈등이 생기면

우선 멀찍이 떨어져서 관찰 후

활활 타고 있는 나를 유일하게 끌 수 있는 물이었다.


지금은 마치 영화 엘리멘탈의 주인공들처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지만

그 당시는 아니었다.


결국 서운함으로 활활 타오른 내가,

불꽃을 던졌다.


- 우리 생각할 시간 좀 갖자.

이야기 시작은 결혼이었지만,

우리가 계속 만나는 게 맞는지도 생각해 봐.


그리고 그는 '알겠다'라는 말을 끝으로

3일 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도대체 카톡은 왜 안 하는 건데?


3일 동안 B의 연락을 기다리며

급격하게 어두워진 나를 눈치챈 엄마.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이자, 조언가였다.


중3 때 사귀던 남자 친구에게 차여 엉엉 울고 있을 때

내일 학교 하루 쉬라며,

대신 그다음 날 가서는 누구보다 즐겁게 지내라는 조언으로

나를 찬 남자에게 다시 고백을 받게 해 준

연애고수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내 친구들은 애인이 생기면

가장 먼저 우리 엄마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어떤 사람인 것 같은지 물어본다.

'여자 문제로 속 썩일 것 같네.' 엄마가 말하면

그 사람은 백이면 백 바람이 났다.

한 마디로 엄마는 사람 보는 눈이 탁월했다.

(B를 보고 흙 속에 진주 같은 사람이라고,

절대 놓치지 말라고 했던 엄마 땡큐!)


"B를 기다려 줘. 좋아하는 마음 하나만 믿고.

생각이 필요하겠지, 가장이 되는 일인데."


"남자가 다 가장이 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어떻게든 해낼 자신이 있다고!

아니 그리고 다른 걸 다 떠나서,

어떻게 3일 동안이나 잠수를 탈 수가 있어?"


"너가 생각할 시간 좀 갖자고 했다며?

그걸 왜 잠수라고 생각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겠지."


평소였다면 무조건 귀 기울였을 엄마의 조언이

전혀 귀에 들리지 않았다.

훗날 우리 결혼식의 축사를 담당하게 될 동생 J도

내가 아닌 B의 편을 들었다.

기다려보라고, B오빠가 그럴 사람이냐고.


그 당시 우리는 썸*이라는 어플을 쓰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씩 공통 질문에 대답을 하고,

대답을 적어야 상대 답을 볼 수 있는 어플인데

문제는 B가 카톡은 안 하고 썸* 대답은

주야장천 하고 있다는 거였다.


아니, 이거 대답 쓸 시간에 카톡을 하라고!!


자존심에 썸* 대답을 안 하고 싶었지만

어플 특성상 내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대답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대망의 3일째, 썸*의 질문은 이러했다.


당시 썸* 질문


오호, 바로 이거다.

어디선가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연락하지 마!"라는 여자의 말은

지금 당장! 연락하라는 뜻이라고.


나는 회심의 답변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내 답변


이 얼마나 자존심 지키면서도,

또 나름 져주는 것 같으면서도,

B가 연락하기에도 좋은 구실이란 말인가!

나는 내 스스로의 기지에 감탄하며(?)

B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러나 우리의 B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다만, 띵동, 썸* 답변 알람만 울렸다.



현재 결혼 자금 거의 300

B의 답변


그리고 그 답변에는

그의 모든 마음이 담겨 있었다.

결국 이번에도 내가 졌다.

내가 먼저 카카오톡 대화창을 열었다.


INFJ 남자와 ENFP여자, 물과 불, 항상 날 이기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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