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작 Oct 13. 2023

피터팬을 사랑하려면 그 속도까지 사랑해야지

04. 어른과 아이, 그 경계선에서


내 꿈? 가난하고 철없는 작가


B와 사귀기 전 꿈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가난하고 철없는 작가'라는 답을 들었다.


A 예술고등학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대학교도 국어국문과, 방송작가과를 졸업한 나의 모토는

'글 읽는 남자는 만나되, 글 쓰는 남자는 만나지 말 것.'


그런데 작가가 꿈인 남자라니!

그것도 '가난'하고 '철없는'의 수식어가 붙은.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님아 제발 글만은 쓰지 마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으나,

나는 이 남자를 꼬시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플러팅을 시전 했다.


- 나, 문예창작과 국어국문학과 테크야.

나한테 소설 쓰는 법 배울래? 커피 한 잔만 사.


- 나야 너무 좋지. 사이즈업 해서 사줄게.


그래서 과외는 어떻게 됐느냐 물으신다면,

아주 안 한 건 아니고,

하는 척만 하다가 결국 데이트로 바뀌었다.

20대 한창의 젊은 남녀가 만났는데

엉덩이 붙이고 글이 써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글 쓰는 남자만은 만나지 않겠다던 내가

글 쓰는 피터팬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먹었다. 

평생 피터팬이 어른이 되는 일은 없게 하리라.

무엇보다 우리 엄마 역시 그의 꿈을 지켜주라 말고,

어려서부터 전업 주부 정반대의 삶을 꿈꿨던 나였기에

돈이야 내가 벌면 되지, 자신 있었다.


전재산 300만 원이 적은 돈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기 카드 대출을 받아 데이트를 하던 B가,

나와 2년을 만나는 동안 300만 원을 모았다.

그것이 중요했다.

얼마를 벌고, 얼마를 모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곳에 돈을 얼마나 쓰는지가 더 중요했다.


B가 지금 당장 가진 돈이 적어 보일지라도,

그는 절대 허투루 돈을 쓰지 않았다.

지난 연애들에서 내가 돈을 더 썼으면 썼지

죽어도 데이트 통장을 안 하겠다던 내가,

B에게 먼저 데이트 통장 제안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 남자는 쓸데없는 것에 돈을 쓰지 않는다.

작은 돈도 신중하게 쓴다.

하지만 정말 써야 할 때, 그리고 나에게 쓰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돈은 너의 돈, 너의 돈은 내 돈이라며

데이트 통장을 권유했었다.


돈은 내가 벌게!


그런데 그 왜 결혼 얘기 끝에 잠수를 타고,

긴 잠수 끝에 자신의 전재산을 대답 대신 내놓은 걸까?


3일 만에 B에게 카톡을 보냈다.


- 왜 카톡은 안 하고 썸*만 해?


- 오랫동안 카톡 안 해서 미안.

생각을 좀 확실하게 정리한 다음에 카톡 하고 싶었어.

너 말 듣고 나니 내 태도가 왜 그랬는지,

앞으로는 어떨는지 생각도 되고.

내 미래 전반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아.


무엇이 B를 그렇게 고민하게 한 건지

그때의 나는 백 퍼센트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건넸다.


- 생각 정리할 시간 더 필요하면 말해.

연락 안 할게.


다행히 이번에 B는,  알겠어라는 말 대신

아니야,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 아니야. 생각 충분히 했어.

오히려 시간 너무 많이 쓴 것 같다.


그냥 우리 결혼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앞으로 내가 여경이만큼 결혼에 헌신적일 수 있을지

여경이 결혼할 사람을 잘못 만난 건 아닌지

집은 어떻게 하고 벌이는 어떻게 할지


계속 이대로 가면 여경이가 너무 힘든 길 가는 것 같고

헤어지면 여경이 인생에 너무나 큰 피해를 끼치는 것 같아서.




반은 이해가 되고, 반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듯이

웨딩홀은 어디가 어떻다더라,

뭐는 어떻게 준비해야 한다더라,

정보 면에서 내가 더 앞서 나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B의 말은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같았다.

철들고 싶어 하지 않던 피터팬이

갑자기 훅, 세월에 휘청이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담아 보냈다.

부디 말이 아닌 글이란 이유로

내 뜻이 왜곡되진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


- 나는 네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최선을 다 해 성실하게 하는 게 좋아.

어쩔 수 없이 출퇴근하는 그런 사람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사람들만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지도 않아.


막말로 고시생도 결혼하려고 하면 하는 거고

집? 월세든 청약이든 방법은 많아.

(그 후 실제로 청약에 당첨된다.)


다만 이번 일에서 내가 느낀 건

B는 경제적인 부분이 아니라

심리적인 부분에서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우리 결혼은 천천히 생각해 보자.


그리고 아주 나중에 우리 정말 결혼할 때,

프러포즈는 B가 해주었으면 좋겠어.

토끼풀을 뜯어다 해도 괜찮으니

절대 내가 눈치는 채지 못하게.




그리하여 우리의 결혼은

그 후로 약 1년 간의 유예(?) 기간을 갖게 된다.


정말로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법의 프러포즈를 받을 때까지.





덧) 당시 B가 보냈던 카톡 내용.



정상의 기준은 그 아무도 모른다.


피터팬은 다행히,

원하는 만큼, 원하는 속도로 꿈꾸고 있다.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고 있는 B에게 감사하며,

나는 그의 속도마저 사랑하기로 했다.


어린이날 선물 받고 좋아하는 어린이.



이전 03화 ENFP 여자, INFJ 남자의 갈등 해결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