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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Sep 30. 2021

막걸리 주전자

 아버지는, 그러니까 너희 할아버지는 말이야. 내가 어릴 적 종종 나에게 빈 주전자와 약간의 돈을 쥐어주며 저 아래 약방에 가서 막걸리를 사 오라고 했단다. 옛날 시골에서는 막걸리를 병에 팔지 않고, 가게에서 직접 만들어 주전자에 담아 팔았던 거 아니? 나는 빈 주전자를 앞뒤로 흔들며 논 사이를 걸었었지. 지금이야 아파트가 있지만 그때 여기는 온통 천지 논밭뿐이었어. 살랑 부는 바람에 땀이 식는 그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를 불렀던 것 같기도 하구나.

 약방 아주머니께서 주전자 가득 막걸리를 채워 주시면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와 그 긴 논길을 다시 걸어와야 했단다. 돌아오는 길은 막걸리를 사러 가는 길만큼 즐겁지는 않았었어. 거의 내 몸통만 한 주전자에 가득 든 막걸리 무게와 머리 위로 내리쬐는 태양까지, 등이 흠뻑 젖을 만큼 땀이 난 데다가 목이 타서 견딜 수가 없었 단다. 막걸리를 한 모금 마셔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구나. 조금 주저하기는 했지만 나는 결국 목마름과 호기심 때문에 주전자 입구에 목을 대고 아버지의 막걸리를 한 모금 맛보았어. 정말 시원했어! 그 달달하고 톡 쏘는 청량감 때문에 목마름이 싹 가실 정도였다니까! 한 모금이 어렵지, 두 번째, 세 번째 모금은 쉬워지더라. 살짝 알딸딸해진 기분이 좋기도 하여 다시 콧노래를 시작했지.

 논길 중간중간에 멈춰서 막걸리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그렇게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는 약간 티가 날 정도로 주전자 안 막걸리가 줄어든 것이 보였어. 그 알딸딸했던 기분은 싹 사라지고 아버지께 혼날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지. 할아버지도 젊을 적 한 성질 하셨거든. 한 모금에서 멈췄어야 했는데, 아니, 막걸리를 마셔서는 안 되었는데 하는 후회를 했어.

 그러나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명석한 구석이 있잖니. 집으로 들어가기 전 수돗가에서 발을 씻는 척하면서 주전자에 물을 살짝 채웠고, 물이 약간 섞인 막걸리를 아버지께 드렸어. 천만다행으로 아버지는 눈치채지 못하셨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더운 날 고생했다며 칭찬까지 해주셨다니까. 그때부터 아버지의 막걸리를 한 모금씩 두 모금씩 몰래 마시는 것은 나만의 비밀스러운 일탈이었어.

 

 내가 이 이야기를 왜 너에게 하냐고? 그냥. 아버지가 돌아가셨잖아. 아빠는 이제, 이제 다시는 너희 할아버지를 볼 수가 없게 되었잖아. 그래서 그냥.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싶더라고.



 

 할아버지네 집 현관 앞에는 항상 페도라가 있었다. 지긋한 백발과 백내장 때문에 회색으로 탁해진 눈동자를 가렸던 안경, 그리고 페도라를 쓰신 할아버지를 기억한다. 그는 다소 말랐고, 그의 훤칠한 키는 어쩐지 나이에 굽혀지지 않았다.


 의외로 엄마는 할아버지가 옛날에는 술을 많이 자셨다고 말했다. 엄마가 젊었을 적 시댁에 방문할 때마다 할아버지는 두 발로 서계신 적이 없다고 한다. 무슨 계기인지는 모르지만 할아버지는 60세가 지난 후 술을 입에서 딱 떼셨다고 한다. 아빠는 할아버지를 닮아서 술을 많이 마시는 건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아빠는 60세까지 몇 년이 남았나 세어본 것 같다. 아빠가 할아버지를 닮은 것이라면 아빠도 그 나이가 되면 술을 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나는 술에 취해 네 발로 기어 다니는 할아버지를 상상할 수 없다, 내가 아빠가 술에 취해 있지 않은 아빠를 상상할 수 없듯이. 할아버지의 동작은 천천하지만 꼿꼿했다. 나한테 할아버지는 그저 멋쟁이 신사였다.  


 애정하던 할아버지는 내가 대학생일 때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빠는 참 약한 사람이고, 원체 울보다. 감수성도 매우 뛰어나서 아빠 주위의 모든 이들, 모든 것들을 불쌍히 여겼다. 아, 본인의 가족은 제외하고. 아빠가 우는 모습을 자주 보기는 했어도 수의를 입고 누워계시는 할아버지를 맞닥뜨렸을 때 아빠가 무너져 내려 우는 모습은 참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쓰리게 했다.  


"아버지, 잘 못했어요. 제가 잘 못했어요. 진짜 잘 못했어요. 술을 못 끊어서 너무 죄송해요. 이제 술 절대 안 마실게요. 아버지, 잘 못했어요." 


 아빠는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싹싹 빌며 용서를 구했다. 나는 그 옆에서 조용히 '할아버지, 좋은 곳에 가셔요' 했다.

 할아버지의 죽음도 아빠를 바꿀 수는 없었다. 예상했듯이 아빠는 할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에 했던 약속을 단 1퍼센트도 지키지 못했다. 아빠의 마음이 진심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진심이었어도, 아빠의 마음은 많이 망가져버려서 진심 어린 약속을 이행하기에는 무리였을 거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한참 자취를 감추었던 아빠의 본성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니라고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니 다행인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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