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단 한 번도 풍족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내 기억이 남아있는 한 우리 집은 항상 가난했다. 학창 시절, 교복을 입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교복이 개인의 개성을 말살한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교복 때문에 그나마 나의 가난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셔츠 목 뒤만 깨끗하게 하면 되었다. 반에서 셔츠 목 뒤가 까만 애들은 못 사는 애들일 확률이 컸다. 셔츠가 몇 개 없거나, 빨래를 자주 하지 못할 사정이 있거나 했을 것이다. 꼬질함에는 어떠하든지 간에 이유가 있다.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평범한 애들은 가난을 맡을 수 없지만 가난한 애들은 가난을 맡을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셔츠 목 뒤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참 애를 썼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만 14살짜리가 돈을 벌고 싶었던 이유는 소소한 바람 때문이었다. 그때 유행하던 나이키, 써코니 등의 브랜드 운동화를 갖고 싶었다. 교복은 그렇다 쳐도 신발만큼은 가난을 숨길 수 없지 않은가. 엄마한테 브랜드의 운동화를 사달라고 떼쓸 만큼 철이 없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우리 집은 등골 브레이커가 되기에도 민망한 형편이었다.
방과 후 학교 근처에 있는 KFC에서 한 달을 일하면 20만 원 정도를 벌 수 있었다. 밤이 어두워지도록 햄버거를 만들고, 감자를 튀기며 번 돈이었고, 30대 점장님의 시시한 농담이나 잘 나가던 고등학생 언니 오빠들의 허세를 견뎌가며 벌은 돈이었다. 그 돈으로 나는 운동화를 샀다. 써코니도 사고 코르테즈도 샀다. 개중 가장 비싼 건 카키색과 회색이 섞인 나이키 맥스 95 운동화였다. 나는 그 이후 평생을 어떤 일에도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도록 부단히 애를 썼다. 도움은 안될 망정 짐은 되지 말자. 내가 14살부터 지닌 마음가짐이었다.
그때 같이 다니던 무리 친구 하나가 나는 가정 형편도 그리 좋지 않으면서 왜 이렇게 비싼 운동화만 신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며 참 철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던 걱정을 가장한 뒷담화였는지, 나에게 조언이랍시고 했던 앞담화였는지 사실 잘 기억은 안 난다. 그 애는 목사님의 딸이었다. 그 애는 착하고 평판도 좋은 애였다. 그 애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땐 그 말이 창이 되어 나를 찔렀고, 나는 내가 부끄러웠다.
그러나 나는 이제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든다. 나는 나이키 운동화로 내가 감당할 수 없었던 가난의 큰 그림자를 가리고 싶었던, 고작 중 2였을 뿐이었다고 반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