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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Oct 01. 2021

마음의 위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그릇보다 더 큰 분노가 나에게 찾아올 때, 나의 불안감이 이 감정의 그릇에 넘치도록 가득 찰 때 나는 글을 갈겨썼다. 글이라고 하기에는 그 내용이 잔인하고 저급하기 짝이 없으니 배설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아빠를 향한 원망과 세상을 향한 저주, 입 밖으로는 낼 수 조차 없을 정도로 험한 말을 종이가 찢어지도록 갈겨썼다. 펜촉이 휘어지고 잉크가 터지도록 그렇게 나는 나의 분노를 종이에 쏟았다. 이 소리 없는 울부짖음을 엄마가 발견하기 전 까지는. 


 나는 일기도 쓰지 않았다. 일기는 하루의 기록이다. 하루를 지워내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일기를 쓰는 것은 찢어진 상처를 헤집는 일과 같다. 내 일기장은 하루의 기록이 아니라 그날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왔다. 쓰고 찢어 버리고, 쓰고 찢어 버리고. 

 그러다 미처 비우지 못한 쓰레기통에 구겨져 버려진 글을 엄마가 보게 되었다. 나는 나의 가장 밑바닥을 보여준 것 마냥 몹시 수치스러웠다. 엄마는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의 얼굴에서 실망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내 엄마는 나를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쳐다본 후 다시 그 종이를 쓰레기통에 넣고 닫았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이런 엄마의 모습에 내 마음은 내가 찢어 버린 종이마냥 찢어졌다. 그리고 나는 종이와 펜으로 하는 폭력을 멈추었다. 그 이후 어떠한 감정도 종이에 남기는 일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 감정의 그릇이 가득 찰 때마다 자해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내 주위에는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장치들이 적었다. 술과 담배를 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고, 다음날이면 모든 일을 잊어버리는 아빠에게 나의 감정을 쏟아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엄마에게 힘들다고 투정을 부릴 수도 없었다. 그러기엔 엄마의 감정의 그릇도 가득 차 있었으니까. 내 딴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래도 나 나름의 선은 있었다. 


첫째, 가족은 모를 것. 

둘째, 상처는 나에게만 보일 것. 

셋째, 상처는 나으면 없어질 것. 


 이 행위가 내 분노와 불안을 한 숟가락 씩 덜어냈다. 손톱으로 몸을 할퀴면 생기는 빠알간 자국들이 점점 연해지는 것을 보면서 괜찮아지는 나를 발견했다. 뺨을 세게 치고 아픔을 참아내며 '그래도 아직 무언가를 느낄 수는 있구나'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몸의 상처와 마음의 상처는 반비례했다.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아픔이 늘어나면 내 마음은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덜 불안했다.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설득되었다. 나는 그 누구에게 피해 주지 않고, 오롯이 내 힘으로 나의 마음을 토닥이는 거라고. 화가 났을 때 남을 때리고,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부수는 방법으로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나는 그렇게 '자해', 나를 해하는 행위가 사실은 '자위', 나를 위로하는 행위라고 스스로를 이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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