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연
방앗간 헹구어놓은 빈 소주병에
누렇게 익은 햇빛이 반짝거리고 있다
병이 서 있는 순간은
무언가 꽉 차 있을 때다
주거니 받거니 뒤끝 작렬하게 물들이던 코끝
맹물로 씻어 거꾸로 엎어 놓은 소주병
그 빈 병에 참기름을 담는다.
소주병일 때는 늙은 할멈 입에서
웬수도 저런 웬수 없다
타박의 대상이었지만
빈병에 참기름이 담기자
세상에 이 또한 귀한 대접이 없다
뚜껑을 열고 닫을 때마다
흘릴까 싹싹 닦아대던 몸값
미끄러질까
보자기에 싸고 두 손으로 감싼다.
콸콸, 따르던 소리 하나 버렸을 뿐인데
참기름 한 방울 아꼈을 뿐인데
대접도 이런 후한 대접이 없다
솜털 박힌 하얀 꽃에서
쏟아지던 깨, 가을이 다 지나고 알았다
맡아보면 고소한 시절 있었으니
깨꽃,
흐트러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오늘도 깨밭에 잘 익은 깨가 톡톡 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