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부르는 물건.
요즘은 참 편리한 세상이다.
지갑 없이도 커피를 사고, 계약서에도 손가락만 까딱하면
서명이 된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변한 시대—
이제는 가방에 이것저것 챙겨 다니는 일도 줄어들었다.
수첩, 지도, 명함지갑, 심지어 필통조차 이제는 휴대폰 속에 들어 있다.
그런 변화 속에서 나에게 유난히 아련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이 있다. 바로 ‘도장’이다.
예전엔 이름이 새겨진 도장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은행 업무에도, 등기 서류에도, 부모의 동의서에도
꼭 찍어야 하던 작은 인영 하나.
그 도장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마치 임금의 옥새처럼,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는 상징이자
내 이름의 권위를 담은 무언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엔 ‘이 아무개의 것’이라는 표시를
눈에 보이게 남기는 문화가 있었다.
문패도 그랬고, 이름을 새긴 도장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누구인지를 ‘찍어야만’ 했던 시대였다.
그 도장이 고급 뿔도장이라도 되면, 주머니에서 꺼내는 순간 어쩐지 으쓱해지던 기억마저 있다.
90년대 초, 유학 중인 동생을 만나러 가족이 함께 중국
북경에 갔던 일이 떠오른다.
당시엔 관광객들 사이에 옥도장, 비취도장을 맞춤
제작하는 게 유행이었다.
이름 석 자를 정성스레 새겨 넣은 그 도장을 받아들며,
나는 ‘한 평생 쓰게 될 물건’이라 믿었다.
작고 단단한 그 물건 안에 앞으로의 모든 시간들이
들어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변했다.
그 도장은 십년도 채 못 쓰고 서랍 속 깊숙이 들어갔다.
이젠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찾으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무언가를 ‘찍고 증명’해야 했던 시대는 그렇게 서서히
사라져갔다.
우표 붙인 편지대신 이메일이, 도장 대신 전자서명이,
종이 대신 클라우드가 대체되는 시대.
그럼에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더는 어떤 권한도 담고 있지 않지만,
그 도장은 여전히 나의 지난 시간을 증언한다.
잊힌 물건일지언정, 그 속엔 내가 한때 누구였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작은 서랍 한구석에서, 어쩌면 그 조용한 물건은 지금도
나의 옛 이름을 부르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