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는 이 청준 선생의 단편 소설 [남도 사람]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1993년 개봉 당시 나는 유럽에서 유학 중이었으므로 영화는 한참이 지나서야 보게 되었다. 남도 특유의 정체성과
전통문화에 깊이 매료된 나는 자연스럽게 선생의 작품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선생님의 작품을 번역하여 유럽에 알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번역부터 할 수는 없었다. 후에 출판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원작자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이제 막 번역을 시작하는 새내기 번역자인 내가 선생의 섬세하고 웅장한 작품을 제대로 녹여낼 수 있을까부터 해서 ’ 어떻게 허락을 얻을까? 내 포트폴리오로 설득할 수 있을까?’ 등등 걱정이 앞섰지만 무작정 번역 계획서를 정성껏 작성했다. 그리고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번역 계획을 설명하고, 어디로 서류를 보내면 될지 여쭈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시간 되실 때 한 번 놀러 오세요. 세르비아에서 박사 하신
유일한 분이 아무렇게 번역하시겠어요. 믿어야지. 심사도
본인이 직접 하셔야겠네. 허허.” 그렇게 허무할 정도로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다음 날 댁으로 뵈러 갔다. 선생님과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댁을 방문해 원작자의 의도를 경청하고 배우며 번역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특히 작품 속 전라도 사투리와 ‘한‘의 정서를 옮기는 작업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음에도 좋은 문장으로 옮길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선생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생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단순한 번역 작업이 아니라,
내겐 깊이 있는 문학적 배움의 시간이었으며 정말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하여 나는 이 청준 선생님의 [눈길]을 번역했고, 이듬해 세르비아에서 출판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을 떠올리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좋은 문학은 사람을 이어주고,
거장은 그 길을 열어주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