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떤 자산을 물려줘야 할까

보이지 않는 재산, 영원한 힘

by 김지향

분명 새로운 길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 길이 묘하게 낯설지 않다.

처음 와보는 길인데도, 마치 오래전 언젠가 한번 지나간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또한,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된 노래를 듣다가도

가슴 한편이 시리게 느껴지는 이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진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설명할 수 없는 향수를 느끼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이미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책 속 한 구절, 누군가와의 대화, 오래된 앨범 속 사진, 혹은 창밖을 스쳐 지나간 풍경까지… 모든 경험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지도처럼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부른다.

산스크리트어 ālaya-vijñāna를 옮긴 말로,

“모든 것을 저장하는 의식”을 뜻한다.

이는 불교 유심론에서 말하는 제8식(第八識)으로, 눈·귀·코·혀·몸·마음이 인식하는 6식과, 이를 종합하고 집착하는

제7식보다도 더 깊은 무의식의 바다이다.


아뢰야식은 단순한 기억 창고가 아니며 그 안에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떠올릴 수 없는 경험의 흔적과 정서가 층층이

쌓여 있다.

마치 심해 속에 잠긴 거대한 산맥처럼, 우리의 성격과 행동, 심지어 인생의 선택까지 이 보이지 않는 힘의 영향을 미친다.


흥미롭게도 서양 심리학에서도 이와 유사한 개념이 있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이 개인의 억압된 기억과 욕망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칼 융(Carl Gustav Jung)의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은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원형(archetype)의 저장소를 뜻한다.

즉,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세대를 거쳐 내려온 상징과

이미지의 패턴을 내면에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의 직관, 상상, 창조성, 심지어 두려움까지 형성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아뢰야식과 융의 집단무의식은 모두 의식의 표면

아래에 존재하는 ‘깊은 층’을 가리킨다.

전자가 모든 경험의 종자를 저장하는 개인적·윤회적 차원의 개념이라면, 후자는 인류 전체의 원형적 기억을 공유하는

초개인적 차원의 개념이다.

하지만 두 이론 모두, 인간의 삶과 선택이 단순한 합리적

판단이 아니라, 의식 깊은 곳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의식의 힘, 무형의 파워가 존재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부모가 욕심내어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이 아니겠는가.

재산, 학벌, 사회적 지위 모두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형태를 잃는다.

반면, 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과 신뢰가 자녀의 아뢰야식,

그 무의식의 깊은 층에 각인된다면, 자녀는 삶의

거센 풍랑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삶에서 불가피하게 마주하게 될 상실, 실패, 좌절은

‘심리적 자본(psychological capital)’으로 극복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받은 인정, 사랑받았다는 확신, 믿어주는 시선은 의식 위로 떠오르지 않아도 평생을 지탱하는 밑바탕이 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안전망이자,

위기의 순간에 꺼내 쓸 수 있는 무형의 무기이자 재산이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에 따르면 마음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6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유식학에서는 이를 더 깊게 확장하여 제7식과 제8식, 즉 아뢰야식까지 설명한다. 이는 마음이 단일한 덩어리가

아니라, 겹겹이 쌓인 층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가 물려줄 수 있는 진정한 유산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의 뜰’에 심어주는 사랑과 자신을 믿는 마음이다.

그것은 자녀가 평생 꺼내 쓸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자본이다. 그래서 최고의 상속은 은행 계좌가 아니라,

무의식 속에 심어진 사랑과 믿는 마음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모든 첫걸음, 시작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