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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사는 것이 왜 이토록 어려운가?

‘호명’-미국에선 이름으로 불린다

by 김지향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우리는 누구나 ‘나’로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회적 역할과 관계 속에서 ’나‘보다

‘누군가의 무엇’으로 불릴 때가 많다.

미국에서는 사람을 이름으로 부른다.

교수와 학생, 상사와 부하 직원도 서로 이름을 부르며

자유롭게 소통한다. 이는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이름을 부르는 행위 자체가 한 사람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반장’, ‘선생님’ 같은 직함이 어린 시절부터익숙하다. 사회에 나가면 ‘부장님‘, ’ 과장님’, 혹은

‘ㅇㅇ의 엄마, 아빠’로 불리며, 심지어 노년이 되어서도 이름보다는 ’ 할아버지’, ‘할머니‘로 불린다. 그래서일까 미국의 시니어들은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데 매우 당당하다.

심리적으로 볼 때, 이름을 부르는 문화는 ’ 자율성‘과 ’ 자기주장’을 촉진한다. 이는 관계의 유연성을 높이고, 개인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집단주의적 문화에서는 ’독립적 자아‘

보다 는 ‘관계적 자아’가 우선시된다. 가족, 조직, 사회

속에서 위계를 존중하고 유대감을 강화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개인의 정체성이 희생될 위험도 있다.

미국에서 처음 이름으로 불렸을 때, 나는 낯설면서도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내 이름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로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구나.‘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제, 우리도 ‘이름’으로 상대를 불러보면 어떨까?

누군가를 ‘ㅇㅇ님‘이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불러보자.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관계 속 역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게 될 것이다.

그 작은 변화가 우리의 사고방식과 태도를 바꾸고,

나아가 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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