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는 백년손님 PART 1] 아내는 이제 시댁에 가지 않는다
결혼 후 저희 부모님은 기자촌으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저희는 옥수동에 살았는데 부모님 댁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아내는 정동 근처 S 커피점에 들러 꼭 카라멜 마끼아또에 생크림을 듬뿍 추가해서 마시곤 했습니다. 물론, 그때마다 저도 한 모금씩 빼앗아 먹었지만 내심 그 돈을 아꼈으면 했습니다. 그 당시 아내는 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제가 투자하며 일하던 회사는 이렇다 할 수익이 없어서 불안정했기 때문입니다.
여느 때처럼 부모님 댁에 들렀다가 집으로 오늘 길이었습니다. 아내는 S 커피점 앞에 차를 세워달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커피점에 들어갔다가 어김없이 생크림 가득한 카라멜 마끼아또를 손에 들고 해맑은 표정으로 차에 올랐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저는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이걸 꼭 마셔야 하는 거야?”
“어.”
“어휴….”
“이걸 마셔야 기분이 풀린단 말야! 이것도 한잔 편하게 못 먹어?”
“아니, 아끼면 좋잖아.”
“치사하게…. 안 먹어!”
그렇게 삐진 아내는 집으로 오는 내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니 찌질하고 못난 제 자신이 싫어졌습니다. 그 후로 ‘아끼는 것도 정도껏 하자’라고 다짐했습니다. 그 뒤로는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시겠다는 아내를 말리지 않았습니다. 그 한 잔으로 아내의 밝은 표정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땐 몰랐습니다. 그 커피가 아내에게는 시댁에서 맞은 ‘독침’을 중화해 주는 '해독제'라는 것을 말이죠. 저에겐 아껴야 할 커피 한잔, 아내에겐 자신을 살려줄 '해독제'였던 겁니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합니다. 이 차이를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될까요? 천만에요.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알게 됩니다. 그나마 상대가 아직 곁에 있을 때 알아채야 의미가 있습니다. 상대가 없는데 이해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내는 여전히 카라멜 마끼아또를 주문합니다. 생크림을 듬뿍 달라는 얘기도 빼놓지 않고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주문하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커피를 받아든 그녀가 빨대로 한 모금 찐하게 흡입한 후 행복한 표정으로 저에게 건넵니다. 아내는 말합니다.
“나는 이 커피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져.”
물론 아내는 이제 이 커피를 해독제로 마시는 게 아닙니다. 커피를 커피로 마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내에게서 건네받은 커피를 마실 때면 그녀를 살려주었던 이 커피가 고마워서 더 맛있게 느껴집니다. 저도 덩달아서 이 커피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부부는 닮아간다고 하지 않던가요.
고부갈등을 겪는다는 건 마치 링 위에 오른 권투 선수와 같습니다. 선수는 때리기도 하지만 맞기도 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냉혹합니다. 먼저 때리지 않으면 맞으니까요. 이기고 지는 승패 이전에 서로 아픔을 주고받습니다. 권투와 다른 점은 이곳엔 심판이 없다는 겁니다. 시어머니의 아들, 며느리의 남편이 심판일까요? 아니면 시아버지가 심판일까요? 아닙니다. 시아버지와 남편은 심판이 아닙니다. 시아버지는 시어머니와 같은 팀의 선수고 아들은 며느리와 한 팀입니다. 여기는 심판이 없는 선수만 있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아버지, 아들이 심판처럼 중재하려고 합니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링은 결투의 링이 아니었습니다. 예쁜 꽃으로 둘러진 울타리였습니다. 서로 싸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우리는 으레 이 링을 싸워야 하는 곳으로 인식했죠. 그러나 그건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우리는 권투 글러브가 필요 없습니다. 이곳은 서로의 손을 잡고 멋진 춤을 추는 정원이었으니까요.
이것을 너무 늦게 깨닫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