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속 이야기6화] 엄마

영원한 내편

by 그림책살롱 김은정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친정엄마와는 많은 대화를 해 보지 못하고 자랐다. 청소년 시절에 가장 부러운 친구는 ‘친구 같은 엄마’를 가진 친구였다. 입고 싶은 옷에 대한 이야기, 친구랑 놀았던 이야기, 카페에서 경험한 이야기, 남자친구랑 싸웠던 이야기, 쇼핑한 이야기 등등 그 사소하고 할 말이 많을 법한 사춘기 이야기조차 엄마랑 하지 못하고 자랐다. 친구 흉볼 때 맞장구 쳐주는 엄마, 남자친구 욕도 대신해주는 엄마, 옷차림에 대해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 등의 작은 일상에도 관심을 가져주는 자상하고 섬세한 엄마의 부재는 사춘기를 겪고 20세가 될 때 까지도 아쉬움이 컸다. 무뚝뚝한 경상도 엄마, 말 수 별로 없고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엄마는 묵묵히 아빠 일을 도왔고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강한 엄마였다.


오빠들 바라기'였던 엄마를 보며 “엄마는 오빠들만 좋아해!”라며 투정을 부렸다. 그럴 때 마다 엄마는 나와 여동생이 오빠들 반 만 닮았어도 좋겠다고 하셨다. 조용하고 얌전한 오빠들,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이라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 칭찬이 자자한 오빠들을 바라보는 엄마는 항상 흡족해 하셨다. 까불이로 장난기 많고 남자애들과 골목을 주름잡으며 놀기 좋아하는 나는 동생과도 잘 다투어서 매일 엄마한테 혼나며 자랐다. 엄마는 말없이 조용한 오빠들 셋을 키우다가 활달하고 조잘조잘 대는 나와 여동생에게 ‘여자애’들이라는 이유와 ‘얌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오빠들과 차별대우를 많이 하셨다.


아빠의 경제적 지원이 약해서 고생하신 엄마가 5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어렸을 때부터 알았다. 초등 고학년 때인가? 그 해 배추가 금값일 때 엄마와 큰오빠가 1.5t 트럭 위에서 배추를 나르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설마, 우리 엄마?'하면서 어둠이 내려오는 초저녁에 친구라도 마주칠까 그 자리를 재빨리 벗어난 적이 있었다. 며칠 동안 엄마가 창피해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아빠가 지은 집에 덩치 큰 세퍼트를 키웠는데 사람이 먹다 남은 밥만 주기 아쉽다며 별식을 주셨다. 시장 어묵집과 튀김집이 저녁 10시 마감할 때 찾아가 남은 것들을 헐값으로 가져오셔서 커다란 덩치 세퍼트 마미와 킹에게 넉넉하게 나눠주셨다. 엄마는 누구에게든 관심과 사랑은 있으나 친데렐레 스타일이 아니었다. 자상하게 말을 건네기보다 말을 짧고 강하게 하고 군더더기 없이 할 말을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하기를 싫어하셨다. 키가 150센티도 안 되는 작은 거인 엄마는 남한테 신세지면 그 이상을 갚으면서 일이든 사람관계든 뭐든지 깔끔하셨다.


그렇지만 엄마는 여전히 오빠들에게 가는 말과 딸들에게 건네는 말의 온도에는 차이가 있었다. 엄마는 성인이 된 오빠들에게는 여전히 허용범위가 넓고 자상한 반면, 나와 여동생에게는 안 되는 게 많았고, 투박하고 야박했다. 그런 대우를 접한 나와 여동생은 同姓인 엄마와의 거리가 오빠들과 엄마와의 거리보다 훨씬 멀고 조심스러웠다. 보통은 딸과 엄마가 친하고 가깝다고 하던데 반대로 우리 집은 오빠들과 엄마가 더 친했고 심리적 거리도 가까웠다. 어릴 적 나의 고민이나 어려움은 엄마랑 상의하기 보다는 혼자 해결하는 것이 훨씬 편했다. 엄마한테 모든 고민을 이야기하고 상의하는 친구들과 우리 집 분위기가 달라 엄마랑 친하지 않게 지내면서 엄마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삶의 고단함을 쓰레기통에 버려 더 이상 꺼낼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엄마를 찾았다. 봇물 터지는 정도가 아니라 폭풍이 몰아치듯 엄마한테 말했다. 날벼락이 벼랑 끝에 떨어지듯 위태롭게 나의 신변에 대한 고민과 새로운 터전을 위한 구호를 외치듯 했다. 얼마나 놀라셨을까? 평소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신변에 대한 이야기도 없었고, 사위가 자주 오지 않았어도 바빠 못 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큰 딸의 가정사를 들은 엄마의 마음은 찢어지다 못해 죄책감을 지니셨을 게 분명하다. 직접 겪은 딸의 심장소리 보다 더 큰 심장의 고동소리를 감추듯 들어야 했을 엄마의 마음이 그 때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나의 숨소리가 가장 컸다. 태어나 돌도 되기 전의 어린 딸과 어떻게 살아내야 한다는 걸 처음으로 말했어야 했기에 평소 속마음 고민을 이야기 하지 않던, 아니 잘 못하던 큰 딸의 고민은 서른을 넘기고 나서야 터졌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신 엄마의 가슴 따뜻한 마음을 알게 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이혼한 후로 여자로서의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픔과 고통을 안고 어린 아이를 안고 온 나를 그 누구보다 온전히 감싸주셨다. 그 당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임신중절수술(지금은 불법이나 20년 전에는 허용)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남편에게 신체적 가해를 당해 여기저기 멍들고 다쳐서 X-ray를 찍었는데 임신인 줄 몰랐다. 며칠이 지난 뒤 심한 복통에 산부인과를 방문했고 임신 4주에 기형을 의심하여 어쩔 수 없이 임신중절 수술을 해야 했다. 전신마취 수술이라 보호자 동의 싸인이 필요했다. 이혼 한 뒤라 내겐 남편이 없었고 친구들에게 보호자 동의를 구할 수 없었다. 친정엄마가 수술 동의서에 싸인을 해주셨고, 수술 후 몸조리까지 엄마가 해주셨다. 그 전까지 한 번도 나의 고민을 이야기 해 본 적 없이 자란 내가 엄마한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을 때, 엄마는 정말 아무 말도, 아무런 이유와 탓도 없이 조용히 병원에 동행해 주셨고 해결해 주셨다. 그 때 일만 생각하면 엄마한테 가슴에 못을 연거푸 두 번 박은 것 같은 죄송스런 마음이 가득하다. 스물일곱 살 겨울에 시집 간 딸이 서른두 살에 이혼하고 어린 손주, 그리고 임신중절 수술 싸인, 산후조리 하듯 돌봄 등 딸의 아픔을 옆에서 지켜보는 母의 마음은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힘들다. ‘엄마가 처음으로 완전한 내 편’임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렇게 느껴서는 안 되는 내 편을 느꼈다.


평소길지 않은 대화라도 편하게 하지 못했던 말들은 어려움에 봉착해서야 해결사를 부르듯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편이 되어주셨다. 평소 자식을 향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잔소리가 많으셨던 말도 아끼셨다. 먹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를 위해 엄마는 잘 먹어야 잘 살 수 있다며 바쁜 일도 마다하고 내 곁에 계셔주셨다. 어린 손주가 서른의 딸 엄마를 찾을 때 마다 안쓰럽게 바라보셨고, 안타깝게 속상해 하셨다. 나에게 있어 딸은 엄마에겐 손주였기에 손주보다는 딸이 먼저였다. 딸의 안전과 딸의 건강이 우선인지라 사랑스러운 손녀가 괜히 미워 친가에 보내지길 원했지만 완강히 그럴 수 없다고 거부하는 딸도 어리석다고 미워하셨을 엄마의 마음을 그 때는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그건 외할머니 마음이고 엄마인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기에 더 많은 고집을 피웠다. 엄마는 언제까지나 내 편이 맞다. 내 딸에게도 내가 편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도 맞다. 부모는 자식 편이 되어야 하는 게 맞다.


홀로 서기를 하고 당당히 설 수 있게 자신감을 심어주신 것도 엄마였다. 어릴 적 누구보다 나를 강하게 키우셨는데, 어쩌면 이런 나의 환경을 이겨내기 위한 무언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소신 있고 당당하게 크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이혼 후 서울, 인천, 의정부에서 다시 고향인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철이 들었다. 그럴 때 마다 엄마는 조건 없이 감싸주셨다. 엄마를 원망하기 보다는 고생하신 엄마께 나로 인해 더 많은 고생을 안겨드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또 내 아이에게 친구 같은 엄마, 언제든 함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상한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만약 자식을 키우면 친구 같은 엄마, 언제든 손 뻗으면 닿는 엄마가 되어야지’가 쉽지 않다는 걸 살면서 알았다. 그 상황 그 때 우리 엄마는 최선을 다 하셨다는 것과 진정 깊은 정성으로 다섯 아이들을 키우셨다는 것을 성인이 되어서야,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알았다. 그럼에도 엄마에게 고민을, 힘듦을 쉽사리 표현하지 못했다.

즐거워도, 힘들어도, 버거워도 살아 있을 때 내 편이 되어 주는 것이 부모다. 갓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곁을 지켜주어야 하는 것도 내 편인 부모님이다. 성장하면서 겪을 자식의 우여곡절을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감싸주는 것도 부모이고, 보면 더 가슴 저리고, 들으면 더 가슴이 떨리는 것도 부모님이다. 잘 되면 자식보다 더 기쁘고, 행복해 하면 더 행복해 하며 자식의 오만 갖가지 일과 마음을 백만 갖가지 마음과 마음으로 가져가는 것도 부모님이다. 부모님의 자식사랑을 굳이 긴 말과 어려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아기 때부터 성장하는 과정에서 엄마와 딸과의 관계를 짧은 단어 “맘마”와 “엄마” 의 단 두 단어로 잘 표현된 그림책이 있다.

강경수 작가가 쓰고 그린 『나의 엄마』는 그림책이라기보다 가슴 먹먹한 사진첩을 보는 듯, 흑백앨범을 보는 듯 가슴 저리게 만드는 그림책이다. 같은 글자의 ‘맘마’와 ‘엄마’를 단어의 크기와 위치, 굵기에 따라 많은 의미를 부여한 타이포그래피 기능을 아주 잘 살린 책이다. 딱 두 음절의 단어로 읽는 이가 어릴 적부터 성인, 지금의 모습과 과거의 모습까지도 스펙트럼을 보듯 감정선까지 살린 그림책이 일품이다.


어릴 적 친구의 엄마가 부러웠다 하더라도 친구 엄마는 내 편이 되어줄 수 없었을 터, 언제든 내 편이 되어주는 엄마가 살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남의 편이 아닌 나의 영원한 편인 가족, 특히 여자에겐 친정엄마의 최고 무기는 언제나 든든하다. 갓 스물 된 내 딸에게도 최고의 무기인 ‘내 편’이 되려 노력중이다. 얼마 전에 딸에게 물어 보니

“엄마는 언제든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오고 들어줄 내 편이잖아.”

라고 이야기 해준다. 다행이다. 내가 자식을 낳으면 친구 같은 엄마가 되기로 한 나의 결심이 현실로 나타난 듯해서 기쁘다. 단 둘이 20년 가까이 살아서 더 애틋한지 모르지만 내가 사는 동안 나의 엄마가 내 편이 되어 준 것처럼 딸에게도 변하지 않는 편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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