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청이 들리고, 환상을 보고, 자해를 하는 것만이 병은 아니다. 병이 다 극단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자연스레 나이가 들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는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을 수 있는 상태가 있다. 언제 이렇게까지 되어버렸나 할 정도로 순식간에 나를 잠식한다. 아무도 모르게, 나 조차도 모르게.
뭣 같은 취준 시절을 견뎌낸 나는 근 5개월 만에 어느 한 중소기업에 간신히 취업할 수 있었다. 먼 미래에 이루고 싶은 꿈이나 포부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는데, 꿈 따위가 과연 있으랴. 계속되는 서류 탈락으로 자존감이 바닥을 치면 취준생의 유일한 꿈은 '월급 받기'가 되어간다. 한 달 벌고 한 달 재미지게 살 수 있을 만큼 가장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상태. 그래서 아무 데서나 제발 한 번만 불러주었음 싶다.
매일, 하루에 서류 제출은 10개씩, 그리고 산업군은 다양하게 찔러보기. 몇 줄 안 되는 사회 경력이랍시고 있는 것은 동아리 회장과 대기업 체험형 인턴 경험뿐이다. 그럼에도 마치 없어서는 인물인 양 역량 있는 능력자처럼 보이기 위해 자소설을 펼쳐낸다. 기깔나다. 인사 담당자가 볼 땐 흔하고 식상한 키워드만 줄지어 서있는 그저 그런 자소서임이 뻔할 것이나 스스로에 취해 어쩌면 될 것 같은 기대를 걸어보기도 한다. 그러다 메시지함에 '1'이 떠 부푼 기대를 안고 메일을 열어보면 입사 후 포부에 B기업명이 적혀 있어 탈락했다는 잔인한 문장이 도착해 있다. 아뿔싸. 이렇게 되면 10군데 중 두 군데는 이미 탈락해 버린 셈이니 오늘의 로또 당첨 확률은 하락세를 그린다.
어디든 하나만 걸려라. 제발 걸려라 하는 심장으로 '즉시 지원' 버튼을 매일 누르다 보니 가능성 없는 게임에 올인하고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우승의 트로피는 쥐어지지 않는다. 그러다 가끔 운 좋게 걸려온 전화에 '바로 가겠습니다'를 시전 하며 주저 없이 응해본다. 하지만 막상 가 보면 허름하고 금방 무너질 것 같은 건물에 시트지로 붙여진 회사명은 'ㅂ'가 'ㅁ'로 바뀌어 알 수 없을 정도로 낡아빠져 있다.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쥐고 들어서면 대표 이사실에 앉은 대표는 비스듬히 앉아 다리를 꼬며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내뿜고 앉아있다. 그리고는 지원자를 아래위로 훑으며 충격적인 질문을 해댄다. 애인은 있는지, 술은 얼마나 먹는지, 운전 경력은 어떻게 되는지, 청소와 운동은 잘하는지, 어제 뭘 했는지 등. 흡사 취조현장과 같은 면접 분위기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어디든 가겠습니다 했던 다짐은 점점 그 현실과 타협하며 스스로 문턱을 높여가고만 있는 현실에 좌절감만 더욱 커진다.
첫 문장 출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 백세희
"당신이 오늘 읽은 첫 문장은 무엇인가요? 살포시 두고 가시면, 이어가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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