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익련리(比翼連里), 꽃별' 노래와 함께 해주세요.
아버지. 참 오랜만에 아버지께 글을 드립니다.
제 밥 벌어먹고 산다는 핑계로 당신께 하나뿐인 얼굴, 자주 비추지 못했고
낯부끄러워 점점 줄어드는 말수에 타들어가셨을 당신의 마음, 헤아리지 못하여 송구스럽습니다.
그것이 불효인 줄도 모르고 귀한 시간을 고이 흘려보내다 이제야 못다 한 말, 글로 전해봅니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귓가에 선명하게 울리던 당신의 음색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이 되었습니다.
듣고 싶지 않았던 걱정 섞인 말들 역시 앞으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어찌 이리 빨리 저를 두고 가셨습니까, 못난 이 놈이 철 지나는 것은 보셔야 하지 않으셨습니까.
불혹을 지내고 나서야, 이제서야, 당신께서 제게 보내주셨던 너른 마음을 알 것만 같은데
왜 제게 만회할 기회는 주지 않으시고 무엇이 급하셔서 이리도 바삐 저를 뒤로하고 가셨습니까, 아버지.
목놓아 소리치고 울부짖어도 다시 메아리치는 것은 결국 제 목소리 뿐인 것이 이토록 아린 것이었습니까.
아버지, 기억하십니까.
국민학교 졸업하던 뼈를 아릴듯한 시린 겨울날을요.
눈이 소복이 쌓이던 그 겨울날, 교실 안에는 멋지게 옷을 차려입은 학우들의 부모들로 가득했습니다. 새벽부터 꽃시장에 들러 활짝 핀 꽃들을 엮어 가장 화려한 다발을 한 아름 안고서 말이죠. 부모 품 안에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졸업을 축하받던 가장 따스한 그 장면 안에서 저는 우두커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폭폭한 눈이 흩날리는 창 밖만 바라보았습니다. 새벽 일찌감치 일터로 간 당신께서는 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떠나셨지만, 혹여나 오시지 않을까 하는 어린 생각에 교문 쪽을 기웃거렸습니다. 하지만, 그 너른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가장 기쁜 추억이 되었을 국민학교의 졸업식은, 제게 또 가장 외로운 날이 되려니 싶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자리를 정리하고 제각각 축배를 들러 나가는 무렵, 저 멀리서 시커멓게 더럽혀진 낡은 운동화로 검은 발자욱을 남기며 뛰어오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몸이 꽁꽁 얼듯한 추운 날씨에도, 머리칼 끝자락이 축축이 젖은 상태로 제 자식을 찾는 사람, 아버지 당신이었습니다. 손과 얼굴은 새까만 석탄 가루에 그을려있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핏기 스민 붕대가 오른손에 감겨 있었습니다.
당신을 보는 순간 화색이 돌았지만, 복도 양 옆에서 우릴 번갈아 바라보던 이들의 따가운 시선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속마음과 달리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지 못했습니다. 고운 어머니와 멀끔한 아버지 없이 거무죽죽한 얼굴에 까맣게 때가 낀 손으로 제 얼굴을 어루만지는 당신의 손길이 싫었습니다. 당장에라도 벗어나고 싶은 부끄러움에 당신을 올려다보지 못했습니다. 당신께서 발걸음 해 주신 그 고마움은 한참이나 멀리에 있었습니다.
그 순간을 견디기 힘들어 벗어나고자 당신의 오른손을 확 잡아챘지만, 제 손아귀에 남은 것은 당신의 푸석한 손이 아닌 축축히 젖은 붕대였지요. 그리고 고개를 돌린 자리에는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당신의 절단된 손이었습니다. 당황과 절망, 비통함과 원망이 소용돌이치며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습니다. 호흡을 뱉을 수 조차 없을 만큼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제 속상함이 먼저였는지 도대체 이곳에 왜 왔냐며 모질게 소리치며 그곳을 박차고 나간 못난 자식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한 번만이라도 제게 오시길 바랐던 간절함이 당신을 다치도록 한 것만 같은 죄책감에 몸서리치도록 괴로웠습니다. 제 피붙이의 외로움을 아셨던 당신께서는 또 한 번 아들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는 사실이 당신을 옥죄였겠지요.
세상에서 가장 비참했던 그날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이 되었습니다. 생각대로 내뱉는 거친 말이 되려 서로를 후벼 파는 일이 될까 봐서 말을 아꼈습니다. 그것이 내가 당신을 사랑한 방식이었습니다. 당신께서도 아셨을는지요. 당신의 방식으로 가장 따스한 사랑을 주셨기에, 저 역시도 제 방식대로 당신께 드리고팠던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요.
평생을 나누겠다 약조한 동반자를 하루아침에 하늘로 떠나보내시어 애통하셨을 터인데
혹여나 당신의 핏덩이가 부모 없는 가엾은 아이로 비칠까 두려우셨지요.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문과 선을 넘는 관심, 혀를 끌끌 차는 마을 사람들의 소리에 다칠까 무서우셨지요.
하지만 '모'없이 자란 아이는 '부'의 사랑만으로도 부족함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픈 사랑이 저의 온 마음과 힘이 되었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늠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 그리고 그 아픔을 같이 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후회스럽습니다.
천진난만한 어린 자식이라는 이유로 하고 싶은 말과, 해서는 안될 말들을 일삼아 왔습니다.
그때의 거친 말들을 주워 담으려 손을 움켜쥐어보지만, 자꾸만 그 틈새로 빠져나가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이 땅에 당신과 제가 유일하게 그린 단 하나뿐인 추억이라며
한참 동안 허리 굽혀 하나씩 거두고 계셨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사랑은 어디까지 입니까.
느지막이 당신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제 마지막 염원이었으나,
아낌없이 주고만 가시는 당신께 어떤 행복을 드려야 합니까 저는.
나의 아버지, 단 한점 부끄러움 없던 나의 아버지.
어머니를 여의고 태어나 저의 눈 안에 처음 담긴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유일한 어미이자, 아비였으며 저의 그늘이자, 해였습니다.
이제는 작아져버린 당신 곁에서 당신만을 위한 바람과 바다가 되겠습니다.
기대어 편히 잠드소서. 나의 아버지.
첫 문장 출처: 봄이다. 살아보자 / 나태주
"당신이 오늘 읽은 첫 문장은 무엇인가요? 살포시 두고 가시면, 이어가 보려 합니다."